김동리 단편소설 『찔레꽃』
김동리(金東里. 1913∼1995)의 단편소설로 1939년 [문장] (임시증간호. 1939.7)에 발표되었다. 돈을 벌기 위해 만주로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순녀와 순녀 어머니의 이야기를 다룬 매우 짧은 소설이다. 순녀가 남편의 당숙을 따라 만주로 떠나는 날, 딸을 보내는 어머니와 떠나는 딸의 심정을 담담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작품은 아래와 같이 서두를 시작한다.
[올해사 말고 보리 풍년은 유달리도 들었다. / 푸른 하늘에는 솜뭉치 같은 흰 구름이 부드러운 바람에 얹혀 남으로 남으로 퍼져 나가고 그 구름이 퍼져 나가는 하늘가까지 훤히 벌어진 들판에는 이제 바야흐로 익어가는 기름진 보리가 가득하다. 보리가 장히 됐다 됐다 해도 칠십 평생에 처음 보는 보리요, 보리 밭둑 구석구석이 찔레꽃도 유달리 야단스럽다. 보리 되는 해 으레 찔레도 되렸다. “매애 매애.” 찔레꽃을 앞에 두고 갓 난 송아지가 울고, “무우 무.”보리밭둑 저 너머 어미 소가 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25살 순녀는 두 아이의 엄마로 친정 동네에서 결혼했다. 순녀의 남편은 결혼 5년 만에 돈을 벌기 위해 만주로 떠났다. 남편이 만주로 떠난 후 2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어 남편이 죽었다고 생각하며 체념한 채 순녀는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의 당숙이 일흔 살의 순녀 어머니를 찾아와 사위가 만주에서 순녀를 데리러 오라고 전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순녀는 남편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을 보살펴 주던 친정어머니와 이별해야 한다는 사실에 슬픔을 느낀다.
끝없이 너른 보리밭 들에서 딸은 가고, 어머니는 딸을 보낸다. 가는 것은 정녕 딸이요, 보내는 것은 역시 어머니가 틀림없건만, 이제 그녀들의 가슴속은 보내는 어머니가 가는 딸이요, 가는 딸은 보내는 어머니로 뒤바뀐다.
작품 속 모녀의 이별 장면은 단순한 서정적인 슬픔을 넘어, 억눌리고 빼앗기고 쫓겨가야 하는 식민지 백성들의 운명을 비극적으로 보여준다. 「찔레꽃」의 소설적 구도는 아주 단순하다. ‘돈을 벌러 간답시고 만주로 간 ’남편의 부름을 받고 떠나는 딸과 보내는 어머니의 심정이 담담하게 서술되어 있을 따름이다.
이 작품들에 설정된 상황은 단순히 전통적으로 불행한 운명을 겪어 온 여인들의 생활상이라고 할 수도 있다. 딸이 남편을 따라 만주로 떠나면 이제 두 모녀는 영원히 만날 수 없을 듯하다. 그러나 그 불행은 남성의 횡포라든지 남편의 무능력이라는 국면에서 관념적으로 포착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순녀’의 현실을 정말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인적 능력이라는 문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그녀의 불행은 어느 박복한 여인의 어쩌다 겪게 된 곤경이 아니라, 식민지 나라에서 살아가는 농민 현실의 절박한 현장을 대변하는 하나의 신음이다.
♣
끝없이 너른 보리밭 들에서 딸은 가고, 어머니는 보낸다. 가는 것은 정녕 딸이요, 보내는 것은 역시 어머니가 틀림없건만, 이제 그녀들의 가슴속은 보내는 어머니가 가는 딸이요, 가는 딸은 보내는 어머니로 되어 있다.
모녀 이별의 이 장면이 사람에 따라서는 하나의 목가적인 낭만이요, 애수가 섞인 아름다움으로만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농촌 현실의 절박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여유 있는 관객의 입장일 뿐이며, 여러 사회적 모순을 자기의 내적 문제로서 느끼고 그것과 아픈 격투를 생명으로 삼는 예술적 고민과는 관계가 없다.
순수문학이란 이론적 깃발이 의도한 모든 불필요한 작시 합리화와 어느 정조 부득이한 위장(僞裝)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의 김동리는 민족적 현실의 밑바닥과 날카로운 연결을 맺는다. 시대적 문맥 속에서 이 이별의 장면은 단순한 서정적인 슬픔의 표현이 아니라, 억눌리고 빼앗기고 쫓겨가야 하는 식민지적 운명의 승화된 비극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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