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훈 중편소설『구운몽』
최인훈(崔仁勳. 1936.∼2018)의 중편소설로 1962년 4월 [자유문학]에 발표되었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물며 존재와 정체성을 탐구하는 작품으로 정치적 알레고리와 초현실적 서사를 결합한 독창적인 소설이다. 이 작품은 꿈속에서 벌어지는 듯한 장면들과 인물의 내면 여정을 통해 현대 사회의 혼란과 인간의 본질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구운몽』은 초현실적 요소와 정치적 메시지를 결합해 20세기 한국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할(선생님, 사장, 혁명군 지도자)은 개인의 정체성이 외부 환경에 의해 얼마나 쉽게 정의되고 왜곡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진정한 자아와 사회적 기대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다. 또한 혁명과 반란, 권력 구조의 불안정성은 한국의 현대사를 은유적으로 반영한다. 주인공의 몰락과 혁명군으로의 재탄생은 체제와 이념의 충돌 속에서 개인이 겪는 혼란을 묘사하고 있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서술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 불확실성을 표현한다. 이는 독자에게 현실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 작품의 비선형적 이야기 전개와 다층적 시점은 독자에게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이러한 서술 기법은 작품을 단순한 이야기가 아닌 해석적 텍스트로 만든다. 또한 작품 속 붉은 넥타이는 혁명과 변혁을 상징하여 개인과 집단의 긴장 관계를 드러낸다. 그리고 입맞춤은 사랑과 인간관계의 지속성 혹은 완결되지 않은 과제를 암시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월세방을 전전하며 홀로 지내는 주인공은 어느 날 집으로 돌아와서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기억 속의 여인으로부터 도착한 편지에는 특정 날짜와 장소에서 만나자는 일방적인 약속이 적혀 있다. 약속일이라 믿고 장소에 나가 오래도록 기다리지만 그녀는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온 주인공은 편지의 날짜를 확인하고 자신이 착각했음을 깨닫고 절망하여 침대에 눕는다.
이후 그녀를 다시 만날 희망으로 거리로 나선 주인공은 춤을 추는 무용수들을 만난다. 그들은 주인공을 "선생님"이라 부르며 자신의 춤 솜씨를 평가해 달라 요구한다. 낯선 여인들에 당황한 주인공은 그곳을 떠나지만, 이내 시인들을 만난다. 시인들 또한 그를 "선생님"이라 부르며 시에 대한 감상을 요구한다. 주인공은 점차 상황이 이상함을 느끼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난다.
다음 날, 우연히 어제의 거리를 지나다 시인들에게 쫓기게 된 주인공은 아무 건물이나 들어가 몸을 숨긴다. 이번에는 그를 "사장님"이라 부르는 감사역과 그의 부하들이 나타난다. 회사의 위기를 해결해 달라는 그들의 요구에 주인공은 또 다시 혼란에 빠지는데 그들은 서로 책임을 전가하며 다투기 시작한다. 이 모든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도망치는 주인공은 어느새 무용수, 시인, 노인들의 추격을 받는다.
혼란 속에서 들려오는 정부군의 방송은 도주 중인 반란군 지도자의 이름을 언급한다. 놀랍게도 방송에서 호명된 이름은 바로 주인공 자신의 이름이다. 군중 속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여인을 발견한 그는 그녀에게 자신이 반란군이 아님을 밝혀 달라고 애원하지만 그녀는 거절한다. 결국 주인공은 정부군에 포위되어 총에 맞고 쓰러진다. 피투성이가 된 그의 모습을 본 군중은 환호한다.
그러나 주인공은 방탄복 덕분에 살아남아 혁명군 차량에 몸을 싣고 도주한다. 라디오 방송에서는 바티칸 특사가 혁명군 지도자에게 살해당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배경음으로 '아베 마리아'가 울려 퍼진다. 이후 혁명군 동지들과 만난 그는 혁명의 지속 가능성을 논의한다. 혁명의 상징인 붉은 넥타이를 언급하며 자신이 진정으로 혁명군 지도자인지 의문을 품는다.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며 그의 정체성은 더욱 불확실해진다.
다음 날 아침, 신경외과 의사 김용길 박사가 등장하며 이야기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다. 그는 꿈과 현실의 경계 그리고 인간 정체성에 대해 사색한다. 병원에서 독고민이라는 이름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시신을 확인한 그는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려 애쓴다.
마지막 장면에서 한 연인이 가로등 아래를 걸으며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남자는 붉은 넥타이를, 여자는 왼쪽 볼의 점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들은 오랫동안 입맞춤을 나누며 소설은 "그들의 입맞춤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이 소설은 동명의 몽자류 소설(조선시대 김만중의 한글소설 '구운몽')을 패러디했다. 최인훈의「구운몽」은 김만중의 고대소설이 가진 그 환상적인 요소와 인과율을 벗어난 플롯의 전개로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최인훈의 「구운몽」에서 주인공의 의식과 소설구성은 해체된 채 파편화되어 있다. 소설 속 상황은 주인공을 끊임없이 당황하게 만들고 주인공을 몰아대는 일종의 폭력이다. 주인공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아 헤매지만 목표에는 결코 이르지 못하고 닫힌 상황에 봉착한다. 주인공은 이 상황을 타개할 주체적인 노력을 봉쇄당한 채 끊임없이 쫓기고 그 과정에서 이질적인 여러 집단을 경험한다. 이러한 경험은 현실의 여러 단면에 대한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통해 소설은 혼돈의 상황과 경험의 도착을 동시에 보여준다.
관 속에 누워 있다. 미이라. 관 속은 태(胎) 집보다 어둡다. 그리고 춥다. 그는 할 일 없이 뻔히 알면서 눈을 뜨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몸을 비틀어 돌아눕는다. 벌써 얼마를 소리 없이 기다려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몇 해가 되는지 혹은 몇 시간인지 벌써 가리지 못한다. 혹은 몇 분밖에 안 된 것인지도 모른다. 똑 똑, 누군가 관 뚜껑을 두드리고 있다.
♣
김만중의 <구운몽>은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인간의 욕망을 초탈하고자 하는 교훈적 성격이 강한 고전소설인 반면, 최인훈의 「구운몽」은 현대인의 불안과 시대적 비극을 성찰하는 실존적 문제의식을 담은 현대소설이다. 두 작품 모두 꿈이라는 장치를 통해 삶의 허상과 본질을 탐구하지만 시대적 배경과 문학적 기법에 따라 서로 다른 주제와 서사로 발전되었다.
최인훈 작품의 주인공은 소설의 출발부터 이미 의식이 몽롱한 상태에 있다. 서술자는 주인공이 처한 상황에 대한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불투명한 환상의 공간으로 독자를 이끌어간다. 이 작품에서 현실과 환상의 구분은 애초에 지워져 있다. 이 소설 전체는 일종의 몽유의 경험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 소설을 콘텍스트를 고려하면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소설은 1960년대 초반의 한국의 정치상황과 연관되어 있다.
4ㆍ19의 좌절과 5ㆍ16으로 인한 권력구도의 변화는 개인의 주체적 자기실현의 가능성을 회의하게 만드는 상황이다. 역사경험의 진실이라는 문제 역시 혼돈 속에 내던져져 있다. 역사의 혼돈은 개인의 분열을 조건짓는다. 그래서 현실은 악몽과도 같다. 이때 소설 쓰기란 이러한 몽염의 현실에 대한 탐색일 뿐이다. 이 탐색은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며 그 현실의 극복도 아니다. 이러한 글쓰기는 그 악몽을 살아내는 방식으로서의 글쓰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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