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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오정희 단편소설 『순례자의 노래』

by 언덕에서 2025. 1. 7.

 

 

 

 

 

오정희 단편소설 『순례자의 노래』

 

오정희(吳貞姬. 1947∼ )의 단편소설로 <멀고 먼 저 북방에>, <전갈>, <불망비> 등과 같은 해인 1983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소외된 여성의 삶을 다루면서 타인 즉, 남편에 의탁된 삶을 사는 데서 생겨난 무의미한 삶을 서술하고 있다.

 작가는 섬세한 내면 정경을 묘사하면서 인간의 존재론적 불안을 섬뜩하게 드러내는 작품들을 써왔다. 초기에는 육체적 불구와 왜곡된 관능, 불완전한 성(性) 등을 주요 모티프로 삼아 타인들과 더불어 살지 못하고, 철저하게 단절되고 고립된 채 살아가는 인물들의 파괴 충동을 주로 그렸다. 그러다 1980년대 이후에는 중년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사회적으로 규정된 여성의 존재보다는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여성성을 찾는 작업에 주력하였다. 단편소설「순례자의 노래」는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상처와 상실, 그로 인한 고독과 자기 성찰을 다룬 작품이다. 섬세한 심리 묘사와 서정적인 문체를 통해 인물의 내면세계를 심도 있게 그려내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혜자는 안정된 중산층 가정의 주부이자 아마추어 인형 제작자로, 겉보기에는 평범하고 단조로운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그녀의 내면은 오랜 결혼 생활과 가사에 지쳐 있으며, 창작 활동을 통해 자신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다. 무더운 여름날, 그녀는 지하실 작업장에서 인형을 제작하며 홀로 시간을 보내던 중, 갑작스럽게 기척 없이 나타난 한 남자와 마주친다.

 남자는 혜자의 작업실에 침입해 그녀를 위협하며 위태로운 상황을 만들어간다. 혼란과 공포 속에서 혜자는 남자를 칼로 찌르게 되고, 이는 본능적 자기 방어에 의한 행위였다. 사건은 경찰 조사 끝에 정당방위로 인정되지만, 이 경험은 그녀의 내면에 심각한 충격과 죄책감을 남긴다.

 정신적 충격으로 혜자는 두 해 동안 정신병원에서 생활한다. 이 기간에 그녀의 가정은 붕괴된다. 남편은 그녀와 이혼한 후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나, 혜자는 점점 더 고립된다. 정신병원에서의 생활은 그녀에게 트라우마를 회복할 여유를 주지 못하고 오히려 잃어버린 삶에 대한 슬픔과 허망함만 더해간다.

 병원에서 퇴원한 혜자는 남편과 아이들이 떠난 빈집으로 돌아온다. 홀로 남겨진 그녀는 집에서 일주일 동안 머물며 자신의 과거와 상처를 곱씹는다. 그녀는 삶이 더 이상 과거와 연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집을 정리한 뒤 홀로 순례의 길을 떠난다. 이 떠남은 단순한 이주가 아니라, 자기 존재를 재발견하려는 여정이자 새로운 삶의 시작을 암시한다.

 

 이 작품은 살인이라는 충격적 사건을 계기로 한 여성의 내면적 변화와 고독한 여정을 그리고 있다. 혜자가 선택한 '순례'는 단순한 도피가 아닌, 자신을 치유하기 위한 자기 발견의 여정이다. 혜자의 죄책감과 상실감은 전형적인 심리소설의 요소를 보여준다. 사건 이후 무너지는 가정과 그녀를 둘러싼 사회적 고립은 인간 존재의 연약함과 함께 사회적 관계의 부조리함을 드러낸다.

 오정희 특유의 서정적이고 섬세한 문체를 통해, 지하실에 위치한 어두운 작업실, 무더운 여름날의 공기, 정신병원의 차가운 분위기 등이 극명하게 묘사된다. 순례의 여정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삶과 죽음, 고독과 치유를 아우르는 상징적 사건으로 그려진다. 주인공 혜자의 경험은 당시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들이 겪는 억압과 갈등을 보여준다. 혜자의 순례는 이러한 억압에서 벗어나 자신을 찾으려는 몸부림으로도 해석된다.

 

 

 이 소설에서 여주인공이 순례의 길을 떠나는 것은 바로 허망하고 끔찍한 삶의 세계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한다. 그 탈출은 인간의 근원적인 존재상, 존재의 심연(深淵), 그리고 존재의 진실에 맞섬이며, 그 심연과 진실은 다른 무엇으로 환원되거나 설명될 수 없다.

 오정희의 여주인공들은 매 순간 탈출을 예감한다. 존재의 심연을 섬뜩하게 응시하는 순간들이 바로 그 예감의 순간들이다. 그러니까 그 예감은 한편으로 심연에의 두려운 응시이면서 동시에 존재의 진실 추구이기도 한 것인데, 여기에 중년의 여인들을 주인공으로 한 오정희 소설의 비밀이 있다. 다음의 이 「순례자의 노래」의 한 구절은 심연에의 두려운 응시가 아니라, 심연으로 걸어 들어가는 절망적인 탈출의 모습을 보여준다.

 ‘돌담길, 꿈에도 그리도 익숙하게 자주 가는 길, 길이 끝나는 곳에는 꿈 깨인 쓸쓸한 현실이 있을 뿐이라고 어렴풋이 생각하면서도 헤자는 꽃처럼 피어나는 취기가 영원히 그 길을 이어주리라는 기대로, 더 깊은 어둠을 향해 한 걸음씩 옮겨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