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석 단편소설 『인형만들기』
최인석(崔仁碩, 1953~)의 단편소설로 1991년 [한길사]에서 간행한 동명소설집의 표제작이다. 최인석은 1980년 희곡 <벽과 창>으로 [한국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극작가로 등단했으며, 1986년 [소설문학] 장편소설 공모에 <구경꾼>이 당선되면서 소설가로 데뷔하였다.
최인석의 소설은 그로테스크한 인물들을 통해 부조리한 현실의 모습을 보여주며 인간다운 삶에 대한 아웃사이더의 열망을 그려내는 것이 큰 특징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배경은 1990년대 서울의 한주빌딩 본관. 한강변에 자리 잡고 있는 지상 23층, 지하 5층에 4대의 고속 승강기가 가동 중인 호화 빌딩이다.
조경현 차장은 승강기 옆 벽면에 붙어있는 '투쟁', '차별 철폐' 등의 구호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승강기에 오른다. 문제의 여자, 영주가 승강기에 오른 것은 12층이었다. 승강기는 다시 출발한 지 얼마 안되어 갑자기 멈춰선다. 경현은 어떻게 해서든지 멎지 않았다는 결론을 얻어내기 위해 숨을 죽이고,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불행히도 승강기는 틀림없이 멎어 있었다.
'어디 근무하십니까' 하고 경현이 물은 것은 순전히 머릿 속에서 제멋대로, 그리고 혼란스럽게 가지를 쳐나가는 자신의 방정맞은 상상을 차단시키자는 의도에서였다. '카페(술집)에 나간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이오?'
'네, 전 차도 갖고 싶고, 집도 갖고 싶어요. 차장님은 이렇게 갇히시는 게 처음인가요? 전 아니에요. 어릴 때 전기세를 못 내서 전기가 끊어지고, 전 그 때 깨달았아요. 제가 갇혀 있다는 걸, 세상은 넓지만, 저는 격리된 다른 세상, 일종의 감방 같은 곳에 갇혀서 살고 있었어요. 전 머리카락으로 인형을 만들고 있는 거예요. 그게 완성이 될 지 안될 지는 아직 몰라요. 하지만, 다른 할 일이 없는 걸 어쩌겠어요?‘
두 사람은 멈춰진 승강기 안에서 정사를 나눈다. 이후 승강기가 수리되고 문이 열렸다. 영주가 승강기에서 내렸다. 조경현은 21층의 단추를 다시 한 번 눌렀다. 승강기는 21층에서 어김없이 멎었고, 스르르 문이 열렸다. 경현은 승강기에서 내려 사장실로 향한다.
사장은 가장 가까이 있는 승강기의 단추를 눌렀다. 몇 분 전 조경현이 빠져나온 바로 그 승강기였다. 경현은 승강기에 올라선 순가, 사람의 머리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늘씬한 여자의 누드 인형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란다.
'아니, 승강기가 언제 수리됐지?'
하고 강사장이 물은 것은 승강기가 이미 1층을 향하여 곤두박질쳐 내려가기 시작한 지 한동안이 지난 때였다.
최인석의 단편소설「인형만들기」는 여러 가지의 중복적인 상징 코드로 무장된 흥미로운 작품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른 채 조명도 꺼져버린 엘리베이터 안에 갇힌 같은 회사의 '조경현' 차장과 여사원 '민영주'의 독백같은 대화와 허공에 멎어버린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격정적인 입맞춤 등은 고도의 산업사회에서 소외된 인간 군상들의 허무한 욕망과 인간적인 단절을 폐쇄적인 공간이라는 위상에 대비시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단전으로 멎어버린 엘리베이터 안의 사람들에 대한 안위보다는 회사의 오너인 회장의 출근시간에 대한 부하 직원들의 부산스러운 강박이 훨씬 더 중시되는 소설 속의 풍경묘사는 곧 돈에 대한 이 시대 대중들의 굴종을 그리는 것과 다름 아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짐짓 걱정스런 태도로 엘리베이터 안에 갇힌 사람이 누구인가를 사장이 부하직원들에게 물은 뒤 올라온, 아무도 연락이 두절된 사람은 없다는 보고문건은 곧 거짓과 위선이 일상을 지배하는 현대사회의 풍자라 아니할 수 없다.
♣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무언가 부족하거나 넘치는, 그래서 이 시대 사람들의 보편적임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상당부분 독자들과 호흡을 함께 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진다. 특히 5공화국에서 6공화국으로 바뀐 시대적 배경 속에서 기업이 어땋게 유지되어 왔는가를 간단하게 언급한 대목과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가지게 되었는가를 지적한 대목에서는 소설이 가지는 역사의식의 한 단면을 읽을 수 있다.
소설이 막 시작되는 시점에 그려진 기업 본사의 풍경묘사는 적어도 이 소설이 어느 지점을 향해 나아갈 것인가를 잘 드러내고 있다. 이런 정황을 근거로 할 때 돈과 권력을 좆는 욕망의 과잉범람이 현대사회의 왜곡된 상황을 잉여의 정도가 가지는 크기만큼 지배하고 있다는 상징적 서두로 읽히기도 한다.
'한국 현대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성희 단편소설 『유턴지점에 보물지도를 묻다』 (3) | 2024.12.12 |
---|---|
최인훈 장편소설 『서유기』 (3) | 2024.12.10 |
손원평 장편소설 『아몬드』 (27) | 2024.11.21 |
황순원 단편소설 『학(鶴)』 (1) | 2024.11.20 |
김주영 단편소설 『새를 찾아서』 (1) | 2024.1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