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외국 현대소설

무라카미 하루키 장편소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國境の南,太陽の西)』

by 언덕에서 2024. 12. 30.

 

 

무라카미 하루키 장편소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國境の南,太陽の西)』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1949∼ )의 장편소설로 1992년 출간되었다. 발표 당시 세계적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인 <상실의 시대(ノルウェイの森)>의 완결편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전 세계 독자들의 관심을 모았던 작품이다. 하루키는 이 작품에서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風の歌を聴け(かぜのうたをきけ)> 이후로 일관되게 고집해온 1970년대를 떠나 ‘현재’를 이야기한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지금 변화하고 있는 자신’이며, ‘마음이 밖을 향해서 열리기’ 시작한 ‘징조’이다.

 이 작품 속 주인공인 하지메는 잃은 것을 열거하거나 찾으려 하지 않는다. 그저 한 여자를 다시 만남으로써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상실할 뿐이다. 그는 시마모토를 매개로 그전까지 큰 불만 없이 살던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인가가 빠져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묻게 된다. 그런 아이덴티티의 탐색은 성공한 삼십 대 사업가의 일상을 ‘엇갈림’과 ‘위화감’, 혼돈’으로 가득 차게 한다. 이러한 혼돈 속에서 하지메는 결국 자신을 수용하고 재구축하면서 ‘자기 회복’의 길을 찾는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1970년대를 벗어나 현재를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은 그러한 ‘재생의 시대’를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일 듯하다. 이 소설은 사회 변화가 극적으로 벌어지는 시대 안에서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변화하고 또 변화하지 않는가를 진지하게 묻는 작품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하지메는 전후 일본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외동아들로 자신을 "특별하지만 고립된 존재"로 느낀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친구 시마모토를 만나게 되는데 그녀 또한 외동딸이다. 시마모토는 하지메와 비슷한 내면적 고립감을 공유하며 서로의 외로움을 이해하며 가까워진다. 시마모토는 다리를 저는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 있어더욱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긴다. 그들은 음악을 매개로 강한 유대를 형성하지만 중학교 진학 후 자연스럽게 멀어진다.

 하지메는 대학을 졸업한 뒤 안정적인 결혼 생활과 도쿄에서 재즈 바를 성공적으로 운영하며 경제적 안정도 얻는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항상 어린 시절의 첫사랑 시마모토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이 자리하고 있다.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시마모토가 그의 재즈 바에 불쑥 나타난다. 그녀는 성숙한 여인으로 변해 있었고 여전히 매혹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하지메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지며 과거의 추억을 나누지만 시마모토는 자신의 현재 삶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으며 신비로움을 유지한다. 하지메는 그녀에 대한 집착과 사랑으로 점점 현재의 삶과 가족을 소홀히 하기 시작한다.

 하지메는 시마모토와의 재회를 통해 자기 내면에 깊게 자리 잡은 공허함과 욕망을 발견한다. 시마모토는 하지메의 감정에 불을 지피고 하지메가 감당할 수 없는 어두운 비밀을 암시하며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그녀의 행동은 하지메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결국, 시마모토는 하지메의 삶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행방은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하지메는 시마모토가 떠난 뒤 깊은 상실감과 혼란에 빠지지만 현재의 삶과 가족을 받아들이며 고통을 견뎌낸다. 

 

 이 작품은 현대인의 고독과 정체성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룬 작품으로 평가받는다첫사랑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통해 삶의 선택과 상실 그리고 회복의 가능성을 철학적으로 조명하기 때문이다. 시마모토는 하지메의 첫사랑이며 흔적이다. 첫사랑은 현실에서는 결코 완전히 채워질 수 없는 이상향으로 하지메의 삶에 지속적인 공허함을 남긴다. 하지메는 외형적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지만 내면에는 설명할 수 없는 공허함이 있다. 이 공허함은 시마모토를 통해 드러나고 그녀와의 만남으로 하지메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마주한다.

 소설에서 음악은 하지메와 시마모토를 연결하는 중요한 매개체이다. 특히 재즈와 클래식 음악은 두 사람의 감정과 기억을 불러일으키며 관계의 긴밀함을 상징한다. 시마모토는 하지메에게 현실적인 인물이면서도 비현실적인 환영처럼 묘사된다. 그녀의 비밀과 모호한 행동은 독자에게 그녀의 정체와 의도를 끊임없이 추측하게 한다. 하루키 특유의 담담하고 섬세한 문체는 주인공 하지메의 내면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현실과 환상을 경계 없이 넘나드는 분위기는 독자들에게 독특한 몰입감을 제공한다.

 

 

 소설의 제목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은 작품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적인 표현이다. 이 제목은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될 수 있다.

 "국경의 남쪽"은 가수 나카타니 미키오(中谷美紀夫)의 일본 노래 ‘남쪽 국경의 해변에서(南国の浜辺で)'에서 영감을 받은 표현이다. 이 노래는 하지메와 시마모토가 어릴 적 함께 듣던 곡으로, 두 사람의 추억과 연결된다. 이 표현은 하지메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이상향, 즉 도달할 수 없는 "다른 세계"이다. 시마모토와의 관계는 하지메에게 있어 그 국경 너머의 세계처럼 몽환적이고 현실적이지 않은 세계이다.

 "태양의 서쪽"은 소설 속에서 하지메가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이야기에서 "태양의 서쪽"은 지구 끝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장소로, 현실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공간이다. 이 표현은 주인공의 내면에 있는 공허함과 끝없이 이어지는 갈망을 상징한다. 하지메는 시마모토와의 관계를 통해 삶에서 결코 채울 수 없는 감정적, 심리적 공백을 느끼고, 이 공허함은 "태양의 서쪽"처럼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막연한 지점을 향하기 때문이다.

 결국,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은 주인공 하지메가 갈망하는 두 가지를 상징하는데, "국경의 남쪽"은 그의 어린 시절의 이상화된 추억과 첫사랑에 대한 동경을 나타내며, "태양의 서쪽"은 그 동경이 가져온 공허함과 충족되지 않는 욕망을 암시한다. 이 제목은 하지메가 현실에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갈망을 품고 살아가며, 그 과정에서 느끼는 상실감과 고립감을 담아내는 역할을 한다. 이는 소설의 주제와 깊이 맞닿아 있으며, 독자에게 이상향과 현실의 틈새에 대해 사색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