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희극 『사랑의 헛수고(Love's Labour's Lost)』
영국 극작가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1564∼1616)의 희극으로 1594∼1595년 또는 1597∼1598년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네바르 왕 페르디난드가 세 사람의 젊은 귀족과 상의하여 3년간 금욕하고 연구에 종사하자고 맹세한다. 그 직후 프랑스 공주가 세 사람의 재주가 뛰어난 젊은 여자와 함께 궁정을 방문하자, 서약을 어기면서 제각기 사랑의 꽃을 피운다. 이 비밀을 지키기 위한 흥정, 상대방을 앞지르려다 여자들로부터 놀림당하는 대목 등 재치가 넘치는 흥미진진한 대화에 젊은 작자의 천재적 솜씨가 잘 발휘되었고, 조연(助演)의 이용에서도 효과적이라고 평가받는 작품이다.
전형적인 희극은 대체로 오해와 시련의 과정을 거쳐서 그것이 해결되면 사랑하는 연인들이 짝을 이루게 되며 끝이 난다. 그러나 「사랑의 헛수고」는 열렬한 사랑의 맹세가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단순한 논리로 가지 않는다. 사랑의 맹세가 열렬해질수록 오히려 남성들의 성실성 결여가 드러난다. 또한 이 극은 ‘신의와 사랑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한가’라는 양자택일의 문제로 향하지 않는다. 이 극에서는 여성들이 '제3의 눈'이 되어 남자들을 바라본다. 남자들의 성격적 결점은 어리석음으로, 여성들은 끝까지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 혜안을 가진 존재로 드러난다. 남자들이 아무리 야단스럽게 맹세해도 결국 그들의 사랑 맹세는 헛것이 되어 버린다.
이 작품은 궁정에서의 사랑을 그린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으로 창작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며, <한여름밤의 꿈> <로미오와 줄리엣> 등과 함께 셰익스피어의 초기 작품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 이 작품은 1597년 또는 1598년 크리스마스 때 초연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게 보이기 위한 궁정 희극으로서 재미있는 언어의 사용이 돋보인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네바르 왕 페르디난드는 학문 연구와 명예를 위해 친구인 비롱, 듀메인, 롱그빌과 함께 3년 동안 금욕 생활을 하기로 서약한다. 그들은 이 기간 동안 여성과의 만남, 과도한 수면, 사치스러운 식사 등을 금지하고 공부에만 몰두할 것을 맹세한다. 그러나 왕과 친구들은 곧 도전 과제에 직면한다. 바로 프랑스 공주와 그녀의 수하 세 명이 네바르를 방문하면서 그들의 서약이 시험대에 오른다.
프랑스 공주는 왕의 서약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목적으로 네바르를 방문한다. 그녀와 동행한 로잘린, 마리아, 캐서린은 각각 비롱, 롱그빌, 듀메인의 관심을 끈다. 각 남자는 자신이 맹세한 서약을 지키려 노력하지만, 각자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결국 프랑스 공주와 그녀의 시종들에게 사랑의 편지와 시를 보내며 마음을 고백한다. 특히 비롱은 서약을 어기면서도 사랑에 대한 열정적인 변론을 펼치며 친구들에게 그들의 맹세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에 반한다고 설득한다.
왕과 세 친구는 각자 연애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 여인들에게 몰래 사랑을 고백한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이 곧 드러나고, 자신들이 수립한 서약의 헛됨과 위선을 깨닫는다. 그들은 연애 감정을 인정하고 프랑스 공주와 그녀의 수하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진심으로 전한다. 그러나 공주와 여인들은 남자들의 마음이 진실한지 시험하기 위해 그들을 조롱하며 즉시 그들의 감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남자들은 각기 다른 여인에게 감정을 고백했다는 오해 속에서 혼란에 빠지고, 이로 인해 좌절감을 느낀다.
왕과 친구들은 자신의 헛된 서약과 위선에 직면하고, 여인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며 사랑을 표현한다. 여인들은 그들의 진심을 알아차리지만, 곧 비극적인 소식이 전해진다. 프랑스 공주의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그녀는 왕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로 인해 각 커플은 사랑이 성사될 것 같은 순간에 헤어져야 하는 기로에 놓인다.
공주와 여인들은 1년 동안 각자 자신의 진정성을 증명하고 성숙한 사랑을 증명해 보일 것을 남자들에게 요구하며 작별을 고한다. 여인들은 왕과 친구들에게 단순한 감정적 애정이 아닌 책임감과 인내심을 요구한 것이다. 남자들은 여인들이 제시한 시험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1년 후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다. 희극적이면서도 현실적인 결말을 맞이하며, 이야기는 미완의 사랑으로 끝맺는다.
당시 궁정에서 매우 인기 있던 주제 가운데 하나인 사랑을 다룬 이 희곡은 궁정 문화의 가치에 대해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귀족 사회의 남녀의 윤리의식을 엿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 큰 줄거리 주변에 과장된 희극 기질의 인물을 여러 명 배치함으로써 정통 희극의 재미를 더한다. 줄거리다운 줄거리가 없다는 구성상의 결함을 지적하는 비평도 있으나, 이 극의 재미는 플롯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아한 분위기와 축제 같은 즐거움, 풍자적 기지가 연극적 효과를 충분히 발휘한 데서 찾을 수 있다.
프랑스 공주 일행이 등장하면서 왕이 선포한 금욕령의 허구가 드러난다. 대사 속 과장된 수사와 언어의 혼용과 오용 그리고 현학성이 두드러지는 말장난의 진수를 보인다. 사랑의 맹세가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결말로 흘러가지 않는 독특한 낭만 희극을 감상할 수 있다.
『사랑의 헛수고』는 ‘낭만 희극(Romantic Comedies)’으로 분류되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중 하나다. 셰익스피어의 비교적 초기 작품으로 생각되는 이 극은 줄거리로는 다소 가볍고, 대단한 내용은 없어 보인다. 주요 플롯에 서민들의 행동은 부 플롯으로 적절하게 섞여 들어가면서 왕이 선포한 금욕령의 허구를 드러낸다. 또 여기에 코믹한 효과를 내는 과장된 수사와 언어의 혼용, 언어의 현학성과 심한 오용이 왕과 세 명의 귀족들의 말장난을 왜곡된 거울이 되어 비춘다.
♣
잠정적인 놀이 규칙을 따라 일시적으로 이루어진 놀이의 세계는 규칙이 깨어지면 와해할 뿐이다. 연극 역시 일시적 약속의 세계 속에서 존재하다가 일정 시간이 되면 그 세계와 함께 사라져 버리게 된다. 왕을 비롯한 세 명의 귀족들과 프랑스 공주와 세 명의 여성이 벌이는 사랑의 계략극 절정은 바로 극중극(play-within-the-play)인 <아홉 영웅>을 관람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이 ‘극중극’이 펼쳐 대던 세계가 사라지는 장면은 프랑스 왕의 서거 소식에 의해서다.
여흥과 계략의 세계가 끝나면 사랑은 이제 야단스러운 말장난이 아니라, 현실이 되어 버리고 그들은 진실성을 시험받는 시험대에 올라야 한다. ‘말’이란 사람의 입을 떠나는 순간 헛것에 지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왕과 세 명의 귀족이 벌였던 연극 세계는 프랑스 왕의 죽음으로 닫혀 버리고, 그들이 현실로 돌아왔을 때는 벌였던 ‘말장난’의 모든 수고가 ‘헛것’이 되고 만다. 극의 제목에서 ‘lost’는 바로 ‘헛것이 되어 버린’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극은 아마도 셰익스피어가 항상 자신의 극 중에서 되풀이해 이야기하고 싶어 했던 “이 세계는 무대(All the World's Stage)”라는 생각을 근간으로 한, 가벼움 속에 있는 삶에 대한 매우 진지한 접근이라 해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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