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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윤흥길 단편소설 『황혼의 집』

by 언덕에서 2024. 9. 12.

 

 

윤흥길 단편소설 『황혼의 집』

 

윤흥길(尹興吉, 1942~)의 단편소설로 1970년 3월 [현대문학]에 발표되었다. 1976년 [문학과 지성] 사에서 발간된 소설집의 제명(題名)이 된 작품이다.

 작품에서 소년은 황혼이 드는 해질녘을 몹시 두려우면서도 끈적거리는 흫분과 호기심에 싸여 기다려지는 시간으로 본다. 저녘놀에 붉게 타는 경주네 주막집을 보고 그는 기괴한 환상에 잠기기도 한다. 경주어머니의 얼굴이 붉은 이유는 술 때문이 아니고 붉은 저녁놀이 얼굴에 묻어 지워지지 않는 탓이라고 믿기도 한다. 

 작가가 황혼을 통해 의도하려는 내용은 독자로 하여금 시각적 이미지 제시를 통해 우울하고, 음울한 분위기, 경주 어머니의 절망과 슬픔을 나타내려 했다고 보인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붉은 황혼이 물드는 해질녘,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허름한 주막에 홀로 앉아 있는 초최한 여인의 모습은 독자로 하여금 작가가 의도한 분위기에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 「황혼의 집」은 이러한 이미지와 분위기 전달을 위한 설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우리 집 맞은편의 폐허가 된 낡은 철공소 건물 옆에 경주네의 오두막이 있다. 경주의 어머니는 그 오두막에서 막걸리를 팔고 있는데, 머슴애처럼 성격이 거친 경주는 동네에서 나를 꼼짝 못 하게 다스린다.

일본 강점기에 잘 살았던 경주네 가정은 해방과 더불어 망조(亡兆)가 든 데다가 경주의 큰언니는 철공소에서 목매어 자살하고 작은언니는 바람이 나서 가출해 버리고 오빠는 전쟁통으로 빨치산이 되어 입산해 버려서 경주 어머니는 정신 이상이 된다.

 어느 날, 경주가 위독해지자 그 어머니는 나를 납치하여 술을 잔뜩 먹여서 취하게 만든 다음 병든 딸을 위로해 주라고 하면서 나에게 노래와 춤을 강요한다. 아버지가 나를 감금 상태에서 구출한 후에 내장산의 빨치산이 읍내를 습격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시가전이 끝난 후에 경주의 오두막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경주 어머니도 행방불명이 된다.

 이듬해 봄에 불타 버린 철공소 건물 벽의 담쟁이덩굴이 파랗게 되살아나는 것을 보고 나는 오랫동안 말썽을 부려 온 충치를 뽑아 지붕에 던지면서 까치가 물어다 줄 새 이빨을 기다린다.

 

 

 ‘나’는 한동네에 사는 경주와 친구 사이이다. 경주의 큰 언니는 빨치산인 남동생에게 자수의 길을 터주려고 하다가 강간당한 후 목을 매 자살했고 둘째 언니는 가출했다. 혼자 남은 경주는 언제나 자기 엄마를 죽일 거라는 이야기를 하고 다닌다. 경주네 집에서는 황혼 녘이 되면 언제나 경주 엄마의 통곡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경주가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자 경주네 집에 놀러 갔다가 경주 엄마가 먹인 술을 마시고 정신을 잃고 만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경주네는 마을에서 자취를 감춘다.

이 작품은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어린 소년의 시선에서 전쟁이 할퀴고 간 한 가족의 비극을 아프게 바라본다. 주인공 ‘나’의 친구 경주네 집에선 황혼이 지면 언제나 경주 엄마의 통곡 소리가 들려온다.

 (전략) 이젠 주막집 유리창에 번득이던 저녁놀을 영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 대신 이듬해 봄이 되자 불에 타죽은 줄 알았던 담쟁이덩굴이 한 해 동안의 긴 몸살에서 일어나 나를 놀라게 하였다. 벽돌집 전체가 무성한 잎에 싸여 온통 푸르게 보이던 어느 날, 나는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오래도록 사사건건에 말썽을 부려온 왼쪽 충치를 뽑아버렸고, 그것을 지붕 위에 던졌다. 그 뒤로도 마을 아낙네들은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왔으나 새삼스럽게 경주네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새 이빨을, 까치가 물어다 줄 건강한 이빨을 기다리는 동안, 어머니와 아낙네들은 어느새 이웃에 새로 이사 온 어떤 새댁의 나쁜 행실에 관해서 열심히들 수군거리고 있었다. ─ 본문에서

 

 

 작가는 여러 작품을 통해 한국 전쟁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 증언해 왔다. 이 작품 또한 그러한 맥락에 맞닿아 있다. 이 작품은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시각적 이미지는 '황혼의 붉은빛'이며 청각적 이미지는 '경주 어머니의 처절한 울음소리'이다. 이 두 이미지가 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가운데, '나'의 눈에 비친 폭력과 슬픔의 세계가 제시되고 있다. '나'에게 폭력의 세계를 보여 주는 인물은 경주이다. 경주는 전쟁의 피해자이다. 경주는 전쟁 때문에 아이의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극도의 폭력성을 보여준다. 이는 어머니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을 드러내는 것이나 개미를 잔인하게 죽이는 데서 드러난다. 이러한 경주와 어울리며 '나'는 폭력과 죽음의 세계를 접하게 된다.

 '나'는 경주와 경주 가족의 불행을 통해 폭력과 죽음의 세계가 존재함을 인식하게 되며, 그것들에 내재해 있는 슬픔도 인식하게 된다. 또한 의식의 성장을 이루고 있다. 작품 끝에서 경주네 주막은 폭격당하고 경주네 모녀도 사라진다. 그리고 이듬해 전쟁으로 불에 타 버린 담쟁이덩굴이 자라 벽돌집 전체를 푸른빛으로 둘러싼다. 이는 고통 뒤에 희망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나'는 자신을 괴롭히던 충치를 뽑아 지붕에 던지는데, 이는 미성숙했던 주인공이 새로운 세계를 인식함으로써 의식의 성장을 이루었음을 암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