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현대소설

최서해 단편소설 『기아와 살육』

by 언덕에서 2024. 9. 11.

 

최서해 단편소설 『기아와 살육』

 

최서해(崔曙海.최학송.1901∼1932)의 단편소설로 1925년 6월 [조선문단]에 발표되었다. 이 단편소설은 주인공 경수가, 아내의 병을 미끼로 탐욕을 채우려는 최의사와 약국 주인 박주사의 몰인정 때문에 결국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는 줄거리의 작품이다.

 최서해는 1925년 계급문학운동의 조직체인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카프)]에 가입한 후 <해돋이>, <전아사>, <홍염> 등의 작품을 발표하게 된다. 이 가운데 <홍염>은 그의 문학세계를 종합한 대표작으로 서간도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침울하고 장중한 묘사력을 보이고 있다. 1926년 [글벗사]에서 창작집 <혈흔>을 발간하였고, 1931년에는 [삼천리사]에서 <홍염>을 발간했다. 이후 [현대평론]과 [중외일보] 기자를 거쳐 [매일신보] 학예부장을 역임했다.

 최서해의 문장은 직설적이고 간결하며 박진력을 가지고 있다. 8년이라는 짧은 창작기간을 통해 발표한 30여 편의 작품들은 대부분 그가 몸소 체험한 것으로 일관되어 있으며, <탈출기>는 자전적 요소를 강하게 지닌 작품으로 꼽힌다. 작품의 주인공들은 거의가 ‘갖지 않은 자’들이며, ‘가진 자’들에게 도전하는 반항이 주제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1925년 7월에 결성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의 발기인은 아니었으며, 스스로 프로문학을 한다고 자처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그의 반항의 문학은 그의 생리였으며, 체험에서 나온 자연발생의 독자적 특질로 판단된다. 그의 문단 진출은 춘원 이광수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이후 3년간의 생활은 [조선문단] 최초의 발행인인 방인근(方仁根)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방인근의 집이자 잡지사인 [조선문단사]에서 방을 한 칸 얻어 살며 사원이자 작가가 된 그는, 그곳에서 김동인 등 당대의 유명한 문인들과 접촉, 문단생활의 발판을 굳혔다. [조선문단]이 경영난으로 휴간된 이후로는 여러 잡지사와 신문사를 전전,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말년에 방탕한 생활에 기울어 재차 발병, 악물 중독에 이르렀다. 1932년 3월 위문협착증으로 수술, 출혈이 심해 7월 관훈동 삼호병원에서 사망했다. 묘는 서울시 중랑구 망우리공원묘지에 있다.

 

소설가 최서해(崔曙海.최학송.1901&sim;1932)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경수는 어머니와 처자식을 부양하면서 극도로 빈궁하게 살아간다. 땅이 없어 농사도 지을 수 없고, 자본이 없어 장사도 할 수 없고, 교사나 사무원 노릇도 말 한 번 잘못하면 쫓겨나는 신세이기에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집주인은 집세를 독촉하고, 아내가 다 죽어가는 판인데 의사는 한 달 내에 진료비를 못 갚으면 일 년 간 머슴살이를 하겠다는 계약서를 받고서야 침을 놓아준다. 그나마 받아낸 처방전을 가져가도 약국에서는 돈이 없다고 약을 지어주지 않는다.

 도저히 타개할 수 없는 궁핍한 현실 앞에서 경수는 탐욕에 물든 최의사와 박주사에게 적개심을 품게 되고, 마침내 잔인한 자기 파괴로 치닫기에 이른다.

 노모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팔아서 ‘한 줌도 못되는 누런 좁쌀’을 사오다 중국인 개에게 물려 인사불성이 된 것을 보자, 마침내 경수의 분노는 폭발하고 만다. 그는 우선 가족을 몰살하고 밖으로 뛰어나와 닥치는 대로 살인을 저지르며 중국 경찰서까지 파괴한다.

 “모두 죽여라! 이놈의 세상을 부수자! 복마전 같은 이놈의 세상을 부수자! 모두 죽여라!”, “내가 미쳐? 내가 도적놈이야? 이 악마같은 놈들 다 죽인다!”.

 

일제시대 만주의 한인들

 

 이 작품에서 주인공 경수가 저지른 살인은, 환경 충격에 의한 자기 방위로서의 나르시시즘적 충동 때문으로 풀이해 볼 수가 있다. 즉, 현실 대응이 더 이상 불가능할 때, 자신을 옥죄는 가족들에 대한 부담이 극악한 환경으로부터 놓여나고자 하는 경수의 파괴적 행동으로 나타난다.

 경수가 발광하게 되기까지의 상황을 대단히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얼마간의 설득력을 얻고 있는 이 작품은, 당시의 전면적 궁핍상을 반영하면서도, 식민지 현실에 대한 개인적 차원의 분노와 저항을 형상화하는 데 그침으로써 조직적 계급 의식의 각성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신경향파적 소설의 특징을 두드러지게 나타낸다.

 

 

 최서해는 1924년 1월 28일 [동아일보]에 <토혈>을 연재하고, 같은 해 10월 춘원 이광수에 의해 [조선문단]에 <고국>이 추천되어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25년에는 <탈출기>, <박돌의 죽음>, 「기아와 살륙」 등을 발표하였는데, 이 작품들은 1923년을 전후하여 성장하고 있던 신경향파 문학론을 실제 창작면에서 실천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간도 유민, 혹은 빈농의 비참한 궁핍상을 제재로 다루고 있으며, 대체로 비극적 파국을 맞는 것으로 소설을 끝맺는다.

 최서해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주인공들의 살인, 방화, 파괴는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현실, 처참한 빈궁과 가족들의 고통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된 최후의 자기방어이기 때문에 독자들의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이 때문에 최서해의 작품은 신경향파소설이 갖고 있는 관념적인 창작경향을 뛰어넘은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신경향파소설이 계급갈등과 도식적인 해결방식을 보여주고 있음에 비해, 최서해의 작품은 극단적인 빈궁 속에서 자연스럽게 성장해가는 하층민의 계급의식의 성장을 그려내고 있다.

 

 


☞방인근 (方仁根.1899∼1975) : 소설가. 호는 춘해(春海). 충청남도 예산 출생.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건너가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등부를 거쳐 주오대학(中央大學) 독문과를 수학하였다. 1924년에는 사재(私財)를 내어 종합 월간 문예지 [조선문단(朝鮮文壇)]을 창간하였다.

 이는 같은 시기에 문단을 풍미하였던 계급주의적 프롤레타리아문학운동에 대항, 민족주의문학을 옹호하기 위한 것으로, [조선문단]은 박영희ㆍ김기진 등의 프로작가들이 활약하던 [개벽]에 맞서서 최서해ㆍ채만식ㆍ박화성ㆍ이장희 등의 문인을 배출시켰다.

 [조선문단] 창간 이후 1927년에는 숭덕중학(崇德中學)에서 교편생활을 하였으나, 1929년에는 [기독교신보사]에 입사, 이어 [문예공론(文藝公論)] 편집, 1931년에 [신생(新生)] 편집장, 1935년 [시조(時兆)] 편집장 등을 역임하였다.

 광복 후에는 영화에도 관여, 1954년에는 춘해프로덕션의 사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초기에는 <하늘과 바다>(1923) 등의 시를 썼으나 곧 소설로 전향하였다.

그는 많은 단ㆍ장편소설 이외에 〈농민문학과 종교문학〉(1927)을 비롯한 평론 및 각 잡지의 월평(月評)을 썼다. 그는 낭만주의적 대중소설을 주로 발표하였으며, 광복 후 한때 탐정물을 시도하기도 하며 소설의 심미적 가치나 사회성보다는 대중적·통속적인 면에 의미를 부여하였다. [조선문단] 창간을 비롯한 문단 활동이 그의 주요한 문학사적 공로로 지적되고 있다.

【단편소설】<분투(奮鬪)>(1923) <어머니>(1924) <비오는 날>(1924) <살인(殺人)>(1924) <죽지 못하는 사람들>(1925) <외로움>(1926) <최박사(崔博士)>(1926) <노총각>(1926) <강신애(康信愛)>(1926) <자기를 찾은 자>(1926) <반동(反動)>(1927) <백의인농민(白衣人農民)>(1927) <순간의 낙원>(1927) <살인방화(殺人放火)>(1927) <금비녀>(1927) <행진곡>(1930) <울며 세배받는 이>(1932) <눈물 지팡이>(1932) <바다를 건너서>(1932) <모뽀이 모껄>(1932) <평화로운 봄>(1933) <박철(朴哲)>(1935) <새길>(1935) <화심(花心)>(1936) <그 후의 방랑의 가인(歌人)> <은행나무>(1941)

【중편소설】 <슬픈 해결(解決)>(1939)

【장편소설】<마도(魔都)의 향불>(1934) <화심(花心)>(1935) <춘몽(春夢)>(1936) <새벽길>(1938) <쌍홍무(雙紅舞)>(1939) <방랑의 가인(歌人)>(1939) <젊은 아내>(1942) <동방의 새봄>(1944) <명일(明日)>(1947) <인생극장>(1954) <여인풍경(女人風景)>(1955) <청춘야화(靑春夜話)>(1955) <동방춘(東方春)>(1956) <복수>

【희곡】<금십자가>(19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