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古典을 읽다

조선시대 한글 야담집 『청구야담(靑邱野談)』

by 언덕에서 2024. 6. 29.

 

 

조선시대 한글 야담집 『청구야담(靑邱野談)』

 

편찬 연대가 순조 말년(1826∼1835년)으로 추정되는 편찬자 미상의 한글 야담집이며, 단편소설이 포함되어 있다. 그 내용과 체재가 비슷한 책들 가운데 내용이 비교적 충실한 점과 그 전사본(轉寫本)으로 추정되는 <해동야서(海東野書)>의 필사연대가 1864년(고종 1)인 점으로 미루어 보아 19세기 중엽 전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은 <계서야담(溪西野談)>, <동야휘집(東野彙輯)>과 더불어 조선시대의 ‘삼대야담집’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중에서도 그 야담집들이 이룩해 놓은 문학적인 성과를 가장 잘 포괄하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는, 우리나라 최고의 야담집이다.

 결구(結構)와 수법(手法)이 묘하고 언어ㆍ풍속ㆍ관습 등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20권 사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마지막 권은 낙질 되어 전하지 않는다. 그동안 이 책에 실린 많은 이야기는, 이른바 ‘한문단편(漢文短篇)’ 또는 ‘야담계소설(野談系小說)’ 등의 이름으로 일부가 번역 소개된 바 있으며, ‘신분 질서의 동요와 가치관의 변화가 크게 일어난 역사적 격변기인 18ㆍ19세기의 현실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각양각색의 다양한 삶을 박진감 있게 집약하고 있는 소설적인 작품들’로 평가받아왔다.

 예컨대, 치부(致富), 추노(推奴), 능동적으로 활약하는 여성, 약사(藥肆)ㆍ저자 등 민중들의 생활 현장에서 살아 움직이는 갖가지 삶의 모습들, 부정한 관리들의 추행과 이에 대한 민중들의 대응, 화적떼, 과거 시험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갖가지 양태의 해프닝 등을 소재로 한 이야기들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그러나 이 책은 비단 그 시대 현실과 직접 관련된 내용의 이야기들만이 수록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민족 신앙의 기층을 형성해온 풍수신앙에 얽힌 기적적인 체험담, 우리 이야기 문화의 중요한 하나의 전통을 형성하고 있는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육담(肉談), 신화ㆍ전설적인 차원의 신비담, 충효담 등등, 우리 민족이 이루어온 ‘이야기 문학’의 유산들을 비교적 두루 잘 종합하고 있어서, 우리 문학의 최고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청구야담」은 조선시대의 여러 야담집 중에서 내용이 풍부하고, 세태 묘사가 자세한 것을 특징으로 삼는다. <계서야담>에서는 아직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사대부들의 간단한 일화는 채택하지 않은 대신, 사대부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라도 행동 양상과 사건 설정이 하층민의 생활을 다룬 것들과 그리 다르지 않게 엮었다. 하층민들이 겪는 사회적 갈등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세태 묘사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를 통해 야담이 소설에 가까운 경지에 이르도록 하였다.

 

 

『청구야담』에는 인간의 욕망이 조선시대 사회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상상 속에서 실현되는지 보여주는 이야기들이 많다. 조선시대 사람들 역시 의식주, 결혼, 자식 교육, 건강, 돈과 명예, 사랑과 애욕 등 다양한 욕망을 품었다.

 ● 배가 고픈 사람에게 죽 한 그릇을 주었더니 그 성의에 감동한 풍수가가 산소로 쓸 만한 좋은 땅을 점지해주는 이야기, 어머니가 우연히 발견한 보물을 자식들에게 비밀로 하여 공부와 생업에 힘쓰게 하고 자식들이 성공하자 보물을 팔아 큰 부자가 되는 이야기는 욕망을 지혜롭게 이루는 과정과 결말을 보여준다. 이들은 이런 욕망을 성취해가는 과정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다른 이들에게 떳떳하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러한 욕망을 이루는 과정에서 주인공은 문제에 부딪히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갈등이 생기기 때문이다.

스님이 소 장수에게 사기를 당하자 사또가 현명하게 억울함을 풀어주는 이야기에서는 재미와 통쾌함까지 느낄 수 있다. 이같이 조선시대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말하고 들으며 이를 통해 얻은 가치·지혜·윤리를 공유하고자 했다.

 

 

 조선시대 이야기판은 고루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치부를 당당히 드러내며 웃음으로 승화했다.

●「부부가 재산을 일구려고 각방을 쓰다」에 등장하는 부부는 가난하기에 자식을 보는 즐거움을 포기하고 십 년 동안 매일 죽 한 그릇만 먹고 각방을 쓰며 동침하지 않기로 한다. 십 년이 지나 부부는 과연 갑부가 되나, 늦은 나이에 출산을 기대하기 어려워지니 결국 양자를 들이고 친자식처럼 키운다.

「생금을 얻어 부자가 한집에서 살다」에는 조동지라는 개성 사람이 양자를 들여 그에게 재물 불리는 일을 시킨다. 그러나 아들이 장사에 실패해 돈을 다 날려버리자 조동지는 아들과 그의 가족을 내쫓는다. 하루는 아들이 생금을 발견해 아버지에게 보여주자 조동지는 아들을 다시 집안으로 불러들이고 부자 관계를 회복한다. 이처럼 가진 돈에 따라 가족관계가 좋아졌다가 나빠졌다 하는 이야기는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조선시대 후기 이야기판에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이 모여 각자 경험을 이야기하고 들었다. 이 시기에는 격동하는 현실에서 계급 분화가 대대적으로 이뤄졌다. 과거에 누리던 특권을 상실하거나 혹은 부를 축적해 새로운 특권층이 된 사람들이 늘어났는데 이들의 이야기는 청중들의 호기심을 크게 자극했다. 벼슬살이하는 사대부 또는 벼슬에서 소외된 사대부, 부농 또는 농토까지 잃어 도둑이 된 농민, 부유한 상인 또는 사업에 실패한 가난한 상인, 벌열 양반 또는 몰락 양반 등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곳이 이야기판이었다.

 ● 송 씨 양반이 궁지에서 옛 종을 만나다」에는 오랫동안 벼슬이 끊겨 몰락한 송씨 집안에서 도망간 옛 종이 지위가 높아져 옛 주인인 송 씨를 만나 죄를 갚고 은혜에 보답하는 내용이 나온다. 부귀해진 종에게 의탁하여 평생을 살아가는 양반 말고도 글재주가 없어 속임수를 써서 벼슬을 얻는 선비, 포수의 아들인 줄로만 알다가 양반의 아들임을 알게 된 아이가 등장하는 이야기를 보면 조선시대 후기에 계층이동이 자유로웠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야담은 기존의 질서를 허문다는 점에서 역동적이다.

「암행어사가 처녀들을 중매해 좋은 일을 하다」에는 혼인할 때를 넘긴 딸 다섯이 혼사를 주선하는 놀이를 한다. 이를 본 암행어사는 처녀들의 사정을 딱하게 여겨 혼례를 치르도록 도와준다. 또 수청 기생에게 넘어가 발가벗은 몸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게 되는 순사 이야기, 남편이 처음으로 한눈을 팔게 된 명기를 직접 찾아가 그녀의 외모를 보고서 인정하며 용서하는 아내 이야기는 애욕으로 인한 해프닝을 다룬다.

「과부가 적선하다」에는 남편을 잃고 어린 아들 둘을 키우며 사는 젊은 아낙의 이야기가 나온다몸으로 쪼들리는 살림을 살자니,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어느날 남새밭을 가꾸느라 호미질을 하는데 무언가 쟁그렁 하고 호미날에 걸린다. 파 보니,은을 가득 담은 항아리가 아닌가. 과부는 누가 볼세라 얼른 도로 묻었다. 그리고는 온갖 신고(辛苦)를 겪으며 자식을 가르쳐 버젓한 어른으로 키웠다. 아들 둘 역시 고생하는 어머니를 생각하여 학업에 힘썼고,차례로 벼슬길에 나아갔다. 집안 형편이 쭉 폈고,알맞은 혼처를 골라 손자도 7,8명이나 보았다. 늙마에도 과부는 건강했고 손자들의 재롱을 보며 안온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하루는 과부가 아들,며느리를 불러 모았다. 남새밭의 한 곳을 파서 은항아리를 꺼내게 하였다. '내가 30년 전에 이 항아리를 얻었지만 도로 묻어버렸다. 너희들이 어린데 갑자기 재물이 생기면 교만한 마음에 공부를 하지 않아 끝내 사람구실을 하지 못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이 재물이 있더라도 사치하고 교만할 염려가 없겠기에 주는 것이다. 좋은 곳에 쓰도록 하여라.' 과부는 적선하기를 좋아하여 굶주린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주고,추운 사람에게는 옷가지를 주었으며,궁핍한 친척은 혼인과 장례도 도왔다과부는 겨울이면 버선을 수십 켤레 지어서 가마를 타고 나가 거지 중에서 버선을 신지 못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추위의 고통 중에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발이 어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어려운 살림에 은항아리의 유혹을 물리치고 신고를 겪으며 자식을 키워낸 슬기가 놀랍거니와, 가난한 사람의 발이 어는 고통을 헤아려 버선을 지어 나누어 주는 그 마음은 아름답기 짝이 없다.

 

 

『청구야담』은 조선시대 여성 독자들의 읽기 요구에 부응해 한글로 번역되었다. 사대부들은 이야기판의 야담이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고 한문으로 먼저 기록했다. 18세기 이후 여성들은 강독사가 읽어주는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들었는데, 그 경험이 책으로 직접 이야기를 읽어보고 싶은 욕망을 부추겨 야담이 한글로 번역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야담집에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고, 또 여성이 자기 능력을 마음껏 펼치는 이야기가 꽤 있어서 여성 독자들에게 환영받았다. 이런 독자층의 성향을 반영하여 한글로 번역된 『청구야담』에는 여성의 감정선을 또렷이 드러내며, 여성의 체면을 중요시해 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과 폭력을 생략하거나 오히려 들춰내기도 한다. 아내가 집안 살림살이를 잘 돌보고 다스려 지혜롭게 가업을 이루는 이야기, 정욕을 숨기지 않고 좋아하는 남자를 유혹하는 평양 기생 이야기는 모두 여성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다. 또 실제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구상한 이야기도 있는데, 임진왜란 때 왜장을 유인해 끌어안고 강물 속으로 뛰어든 논개가 대표적이다.

 야담(野談)은 입으로 구연이 되던 이야기, 책으로 전승되던 서사적 단편, 그리고 조선 후기 현실에서 생성된 일화들을 기록하고 승화시킨 것이다. 야담은 전설이나 일화보다 길지만, 소설보다 짧다. 야담에는 일화적인 것도 있고 소설적인 것도 있지만 ‘야담적인 것’이 더 많다. 야담은 매우 다채로운 내용을 담고 있어서 우리 민족의 인간상과 생활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박물관과 같다.

 야담은 단순히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야기였다가 본격적인 서사 작품이 되었다. 특히 조선 후기에 들면서 야담에는 당시 사회와 사람들의 현실 인식이 대폭 반영됐다. 야담집 편찬자나 작자는 기존 이야기를 옮기는 데 머물지 않고 이를 부연하고 윤색했다. 여러 이야기를 결합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야담의 발전은 조선 후기 문학의 역동성을 보여주며 우리 근대문학의 주체적 형성을 말해주는 훌륭한 증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