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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김소진 단편소설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

by 언덕에서 2024. 6. 4.

 

 

김소진 단편소설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

 

김소진(金昭晋. 1963∼1997)의 단편소설로 1997년 [21세기 문학] 봄호에 발표되었고 그해 가을 간행된 단편집의 표제작이다.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는 재개발로 인해 유년 시절의 상처를 간직한 기억의 현장이 해체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도시 주변부 민중들의 삶의 모습을 풍부한 입말과 ‘회상’의 형식으로 보여주었던 김소진 문학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은 1997년 김소진이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 발표한 작품이다. 김소진은 199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쥐잡기>가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는데 그의 작품은 유년의 ‘기억’을 통해 후기 자본주의 사회가 지닌 폭력성을 드러낸다. 등단작인 <쥐잡기>에서부터 생애 마지막 작품인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에 이르기까지 김소진은 1970년대 산동네 민중들의 삶을 풍부한 구어체로 되살려냈다. 이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로 치닫기 시작한 1990년대 한국 사회의 이면을 1970년대 도시 주변부 밑바닥 삶과 병치함으로써 시대의 틈을 횡단하며 존재하는 현대인의 실존적 문제를 보여준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30대가 된 나는 어머니의 요청과 개인적인 볼 일로 도시 재개발로 폐허가 되다시피 한 미아리의 옛집을 찾아가게 된다.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한 지붕 아래 아홉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장석조네 집이 목적지다. 그곳은 내가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그곳 미아리 산동네로 향하면서 ‘나’는 이십 년 전 기억을 떠올린다. 유년 시절 나는 오줌을 누러 마당 밖 변소로 가다 땅에 묻어둔 욕쟁이 할머니의 짠지 항아리를 깨트렸다. 야단을 맞을 것을 두려워한 나는 실수를 감추기 위해 짠지 단지를 눈사람으로 위장해 숨겨버렸다.

 “눈사람 속에 감춰진 비밀”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한 ‘나’는 하루 동안 가출한다. 갈 곳이 없는 나는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지만, 마당에 있어야 할 눈사람은 이미 치워져 버린 후였다. 내가 가출한 사이 사건을 무마한 어머니는 내게 가벼운 꿀밤을 때렸다. 이 사건으로 ‘나’는 “세계가 나와는 상관없이 돌아간다”라는 깨달음과 함께 “자신을 상대하지도 혼내지도 않는 세계”가 존재함을 느끼고 혼돈에 빠진다.

 그날 옛집 동네에서 친한 동네 형을 만나는 등 용무를 마친 나는 갑자기 똥이 마려워짐을 느낀다. 재개발로 반쯤 부서진 집들 사이에서 큼직한 항아리를 발견한 나는 그 속으로 들어가 벽돌과 깨진 장독 쪼가리를 디디고 똥을 눈다.

 

 김소진이 살아 발표한 마지막 작품인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에는 앞뒤 없이 느닷없이 튀어나온 “나는 그렇게 컸다”라는 구절이 있다. 미아리 산동네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내뱉은 말인데 그 아래에는 가난에 짓눌린 어린 혼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채로 시뻘겋게 입 벌리고 있다. 그 상처는 김소진 문학의 맨 아래쪽에 자리를 잡아 이처럼 느닷없이 곳곳에 튀어나온다.

 그런데 그 상처는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가족들은 물론이고 미아리 산동네에 삶을 부리고 힘겨운 하루하루를 견디는 모든 장삼이사의 것이며, 나아가 세계의 폭력성에 치이고 억눌린 사람 모두가 공유하는 부분이다. 작가의 작품 속 인물들은 대부분 그런 상처를 영혼 저 안쪽에 품고 있는 존재들이다. 상처의 텅 빈 구멍을 가진 자들, 상실감의 구덩이에 뿌리를 두고 떠 있는 존재들, 그래서일까, 그들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들, 밖으로 환하게 열린 공간보다는 안으로 어둡게 닫힌 공간을 더 좋아한다.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는 전쟁과 분단이라는 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한 가족사와 유년 시절 미아리 산동네 체험을 바탕으로 쓴 단편이다. 작가는 역사와 운명에 휘둘리고 현실의 변두리로 밀려난 사람들의 삶에 주된 관심을 보였다. 당대 민중들의 고단한 삶에 드리운 사실주의 정신은 풍부한 토속어의 문장에 실린 따뜻하면서도 아픈 해학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유년 시절의 상처를 간직한 옛 동네가 도시화로 사라져가는사라져 가는 광경을 통해 한 인간이 지녔던 기억의 토대가 사라져 가는 도시 주변부의 삶을 드러낸다. 재개발로 인해 원주민들이 이주한 철거 현장에서 항아리에 똥을 누는 마지막 장면이 특징적이다. 그것은 유년의 기억을 간직한 삶의 터전이 상실되어 가는 현실에 대해 안타까움이다. 또한 유년의 기억이 해체되어 가는 현실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현실적 자괴감의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