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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김경욱 단편소설 『장국영이 죽었다고?』

by 언덕에서 2024. 6. 6.

 

김경욱 단편소설 『장국영이 죽었다고?』

 

 

김경욱(金勁旭.1971∼ )의 단편소설로 2004년 [한국일보 문학상] 수상작이다. 그해 발간된 단편소설집의 표제작이기도 하다.

 김경욱 소설에서는 영화와 텔레비전 같은 대중문화매체가 꾸준히 등장한다. 이 소설집에서도 영화와 극장은 빈번히 등장한다. 작중인물들은 이러한 대중문화매체에서 정보를 얻고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다. 그러나 그 정보가 허구라는 점이 드러날 때, 혹은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할 때, 인물들은 당황하고 심지어 배신감마저 느낀다. 경쾌하고 속도감 있는 문장으로 독자들을 압도하고 있는 것이 김경욱 소설의 장점이다. 「장국영이 죽었다고?」라는 작품에서 그의 죽음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그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그가 주연한 영화 <아비정전>의 내용과 영화에서 장궈룽(장국영)이 보여준 캐릭터, 연기 등을 알고 있어야 한다. 장궈룽(장국영)이 영화에서 보여준 것은 ‘소외와 침묵’이었다.

 아버지의 보증을 섰다가 재산이 다 털리고, 이혼하고, 신용불량자로 전락한 주인공 ‘나’는 PC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ID가 ‘이혼녀’인 한 여자와 채팅을 한다. 현실세계에서 쫓겨난 주인공이 안주할 수 있는 곳은 ‘가상세계’이다. 현실세계로부터 소외된 자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풀기 위한 가장 적합한 장소가 바로 가상세계로 작품의 결말은 이를 확인시켜준다. 가상공간이 주무대인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결말 부분에서 주인공은 활달한 기운을 느끼며 흥분한다.

 1993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중편소설 <아웃사이더>가 당선된 김경욱은 2004년 단편소설 「장국영이 죽었다고?」로 제37회 [한국일보 문학상]을, 2007년 단편 <99%>로 제53회 [현대문학상]을, 2009년 <위험한 독서>로 제40회 [동인문학상]을 받았다.

 

영화 [아비정전] 1990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은 "그 누구와도 관계하지 않음으로써 나는 겨우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존재다. 아버지의 보증을 섰다가 신용불량자가 돼 이혼했고, PC방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시원에서 살아간다.

 내가 세상과 관계하는 것은 PC방의 컴퓨터로 인터넷에 접속해 채팅할 때 뿐이다. 어느날 '이혼녀'라는 아이디와 채팅하던 나는 장국영이 자살했다는 뉴스를 전해 듣고, 전처와 개봉관에서 '아비정전'을 보던 기억과 영화에 나오던 '발 없는 새' 대사를 떠올리는데, '이혼녀'도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그 영화를 봤다는 말을 듣는다.

 며칠 후 나는 '발 없는 새'라는 아이디로부터 검은 양복과 마스크를 하고 '아비정전'을 보았던 그 극장으로 나오라는 이메일을 받는다. 그날 극장 앞에는 50여명의 같은 차림을 한 남녀가 모여들었고, 그들은 매표소 앞에 줄을 서는 같은 행위를 반복하고는 하나둘 사라져버린다. 이른바 플래시몹☜이다.

 내가 그 행위를 "그것은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활력이었다. 그 뜻밖의 활달한 기운은 세상의 어떤 의미에도 복무하지 않았으므로 나를 더욱 흥분시켰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장국영이 죽었다고?」는 그 어떤 의미에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우리시대 젊은이들의 삶의 모습을 다양한 문화적 코드들과 함께 절묘하게 포착해낸 작품이다. 하필 만우절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살해버린 홍콩스타 장국영이 중심 모티프로 놓여 있고, 여기에 신용불량자가 되어 회사에서 밀려나고 가정조차 깨져버린 한 남자의 삶과, 그 남자가 인터넷을 통해 접속하게 되는 한 이혼녀의 삶이 중첩된다.
 두 남녀가 나누는 대화 속에서는 쓸모없는 기억들이 연쇄를 이루는 가운데 그 흐름 속에서 돌연 장국영의 죽음이라는 기호가 삽입된다. 그럼으로써 쓸모없는 기억들의 무의미함은 그들끼리 대화를 나누며 새로운 유대와 활기를 만들어낸다. 그 활기가 소설에 마지막에 놓여 있는, 플래시몹이라는 무의미의 집단적인 퍼포먼스로 발현된다. 그것은 곧, 그 어떤 의미의 흐름으로부터도 벗어나버린 것들의 유대가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순간이며, 그것을 확인함으로써 무의미함과 쓸모없음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활기를 획득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같은 방식으로, 유용성의 세계로부터 시대의 우울 속으로 추방당한 사람들의 새로운 의미와 활기를 포착해내는 모습을 형상화해냈다.

 

 

 2003년 4월 1일 영화배우 장국영이 홍콩의 한 호텔 24층에서 투신자살했다. 47세였다. "세상에는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날아다니다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쉬지. 평생 단 한 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야." 그가 주연했던 영화 '아비정전'(1990)의 대사다.

 '땀에 젖어 축축해진 손가락을 마우스 위에 얹은 채 모니터를 집요하게 노려보고 있는 익명의 군중'. 나도, '이혼녀'도, '발 없는 새'도, 플래시몹의 남녀들도, 김경욱이 묘사하고 있는 익명들이다. 현실보다는 영화나 인터넷이라는 가상에, 의미보다는 무의미에, 관계하기보다는 접속에 기댐으로써 겨우 존재할 수 있는 '장국영 세대' 혹은 우리 시대의 초상 같은 소설이다.

 사이버 공간은 개인의 특수성을 더 강하게 드러내주는 곳이다. 내면의 온전함이 잘 드러나는 그 공간에서는 마치 내가 받아들여질 것 같은 착각을 들게 한다.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는 우리는 끝없이 무언가에 매달린다. 작중 화자는 오프라인의 관계를 회피하려 하고, 오로지 온라인 속의 관계에만 신경을 쓴다.

 그가 지속적으로 채팅 활동을 하는 것과 끝없이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며 상품을 타내는 것이 그 증거다. 그러다 그의 호기심을 자극한 ‘이혼녀’의 부름에 이끌려 그 사람에게로 더 나아가고 싶다는 생각에 메일을 받고 찾아가지만 그곳에는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그곳에선 나라는 존재의 특수성을 과감하게 깨버린다. 결국 나는, 내가 타인들과 똑같은 족속이라는 사실과,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유아적 발상을 멈추게 된다.

 


플래시 몹(Flash mob) : 불특정 다수인이 전자 우편이나 휴대 전화로 연락하여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 모여 주어진 행동을 하고 곧바로 흩어지는 일. 네티즌들이 오프라인에서 벌이는 일종의 놀이로, 주로 뚜렷한 목적 없이 단순한 재미를 위해 벌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