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현대소설

천명관 장편소설 『고령화 가족』

by 언덕에서 2024. 6. 24.

 

 

 

천명관 장편소설 『고령화 가족』

 

천명관(千明官, 1964~)의 장편소설로 2010년 [문학동네]에서 간행되었다. 천명관은 골프용품 가게의 점원, 보험회사 영업사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서른이 넘어 영화판에 뛰어들었다. 이후 충무로에서 영화 <총잡이>와 <북경반점> 등의 시나리오를 집필했으며, 마흔이 다된 2003년 [문학동네 신인상] 소설 부문에서 단편소설 〈프랭크와 나〉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2004년 제10회 [문학동네 소설상]에서는 장편소설 <고래>가 당선되었다.

 장편소설 <고래>에서는 하나의 이야기가 또 다른 이야기를 낳고, 그 이야기가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며 한바탕 휘몰아치는 ‘이야기의 장’을 펼쳐 보였다면, 장편소설 『고령화 가족』은 일인가족이 대세가 되어가는 현실 속에서 한 가족 안에서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벌이는 온갖 사건·사고와 그들 간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유쾌하면서도 애틋하게 그려내었다.

 이 소설 『고령화 가족』은 2013년 송해성에 의해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윤여정, 박해일, 공효진, 윤제문 등이 주연을 맡았다. 이 영화에서 가족의 어머니 역할로 출연한 윤여정은 영화 <바람난 가족> 이후 10년 만에 실험적 가족영화에 출연해 색다른 모습을 보였는데 명품 연기로 연기적 화음을 고고히 쌓아나가 작품을 환기해주었다는 좋은 평가가 나왔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나(오인모)’는 실패한 영화감독으로 이혼 후 신용불량자에다 알코올중독자가 되어 노숙자 직전의 상태에서 엄마가 사는 집에 들어간다. 엄마는 일흔의 나이에 화장품 외판원을 하는데 아버지는 5년 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엄마의 집에는 나보다 네 살 많은 형이 빌붙어 사는 상태다. 내가 엄마 집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과 이혼한 여동생도 딸을 데리고 엄마 집에 들어온다. 나의 여동생 미연은 엄마가 아버지와 살면서 전파상 구 씨와 바람 피우다 낳은 나와는 '씨가 다른' 자식이다. 이리하여 평균 연령 47세의 다섯 사람이 24평의 작은 집에서 살기 시작한다.

 형 오한모는 답 없어 보이는 백수에 전과자 딱지까지 달고 있다. 양식을 축내며 52살의 나이에 무위도식하며 엄마에게 빌붙어 산다. 특이한 것은 그가 집안 누구와도 혈연으로 맺어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한모는 아버지의 전 부인이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며 미연은 엄마가 불륜으로 낳은 자식이다. 그 점을 알면서도 끝까지 엄마는 한모를 품어주고 보듬어준다.

유일하게 이 집안의 브레인이자 대학을 졸업한 나도 사실 답이 없는 인간이기는 마찬가지다. 쫄딱 망한 영화감독 출신이며 바람난 아내의 이혼한 후 알콜중독자가 된 상태다. 나는 세 남매 중 유일하게 엄마와 아버지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다.

 결혼을 밥을 먹듯 하는 여동생 미연은 구타를 일삼는 폭력 남편과 과감히 이혼하고 세 번째 결혼하려는 중이다. 비좁은 외할머니 집에서 생전 본 적 없는 외삼촌들과 부대끼고 사는 불량소녀 민경은 결국 폭발하고 가출한다. 하지만 가출청소년이 흔히 그러하듯 범죄자들의 꼬임에 빠져서 하마터면 성매매 조직에 잡혀갈 뻔하다가 폭력배 출신인 외삼촌 한모의 도움으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다.

 한모는 과거 알고 지내던 폭력조직의 도움으로 조카를 구해내지만, 그 대가로 불법 성인도박업체의 바지사장이 된다. 엄마가 전파상 한 씨와 같은 집에서 살게 될 즈음에 한모는 교도소에 가지 않기 위해 조직의 자금을 털어 미용사 수자와 캄보디아로 도망간다.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에로영화를 찍던 나는 결국 해당 폭력조직의 수하들에게 린치당하지만, 형 한모의 도망 장소를 말하지 않는다. 결국 나는 만신창이가 되어 풀려나와서 이혼녀 윤주의 도움으로 그녀의 오피스텔에서 몸조리하다 그녀와의 새 출발을 결심한다.

 

 

 집을 떠난 지 이십여 년 만에 세 남매는 모두 후줄근한 중년이 되어 다시 엄마 곁으로 모여든다. 일찍이 꿈을 안고 떠났지만, 그 꿈은 혹독한 세상살이에 견디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이혼과 파산, 전과와 무능의 불명예만을 안고 돌아온 세 남매를 엄마는 아무런 조건 없이 순순히 받아준다. 그리고 그 옛날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 다시 끼니를 챙겨주기 시작한다.

 엄마는 젊은 시절, 외간 남자와 눈이 맞아 자식들을 팽개친 채 야반도주하기도 했지만 어두운 진실을 사십 년간 감쪽같이 덮어둔 채 배다른 자식과 씨 다른 자식을 억척스럽게 한 집에서 밥해 먹여 건사한다. 또한 엄마는 세상사에 실패하고 돌아온 자식들은 다시 거둬주고, 뒤늦게 재회한 옛사랑을 불륜의 씨앗인 딸의 결혼식장에 불러들인다.

 '가족'의 위기가 이제는 낯설지 않은 우리 사회에서 '가족'을 소재로 하는 작품은 아주 많다. 하지만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좀더 다른 시각으로 '가족'이라는 소재를 다룬다. 세련되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가족의 좌충우돌 생존기를 통해 무조건적인 사랑의 보금자리도 아닌, 인생을 얽매는 족쇄도 아닌 ‘가족’의 의미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 작품을 통해 구차하지 않고, 질척거리지 않는, 특이한 개성을 가진 가족 구성원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전략) 나는 언제나 목표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 이외의 모든 것은 다 과정이고 임시라고 여겼고 나의 진짜 삶은 언제나 미래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 결과 나에게 남은 것은 부서진 희망의 흔적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헤밍웨이처럼 자살을 택하진 않을 것이다. 초라하면 초라한 대로 지질하면 지질한 대로 내게 허용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내게 남겨진 상처를 지우려고 애쓰거나 과거를 잊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겠지만 그것이 곧 나의 삶이고 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 본문 286쪽

 특이한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가족을 소재로 작가는 ‘가족’의 의미를 찾아간다. 조건 없는 사랑의 보금자리도 아닌, 인생을 얽매는 족쇄도 아닌 원시적이고 동물적 개념의 가족이다. 우리 주변에 흔하디흔한 것이 가족에 관한 이야기이고, 뻔하디뻔한 것이 가족에 대한 사랑 이야기지만 이 소설은 구차하지 않고, 애틋하며 흡입력 강한 이야기라고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