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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오상원 단편소설 『유예(猶豫)』

by 언덕에서 2024. 7. 11.

 

 

오상원 단편소설 『유예(猶豫)』

 

오상원(吳尙源. 1930∼1985)의 단편소설로 195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작가는 전쟁을 치르고 난 뒤의 인간의 존재 가치, 생명의 본질, 삶의 모습 등에 관심을 두고 작품을 썼는데, 이 작품도 그러한 연장선상에 놓인다. 6ㆍ25 때 수색대 소대장으로 인민군 포로가 되어 총살을 1시간 앞둔 '나'가 느낀 심리적 갈등을 그린 작품이다. 오상원의 데뷔작이자 출세작인 이 작품에서 작가는 의식의 흐름이라는 서술 기법을 사용하여 전쟁이란 상황 속에서 한 인간이 겪는 경험과 그 속에서의 생각들을, 인민군의 포로가 되어 처형당하는 국군 소대장의 내면세계를 통해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의 인간의 실존적 의식을 묘파하고 있다. 주인공은 6ㆍ25 전쟁에 참가한 지식 청년으로, 그가 처해 있는 상황을 자각하면서 생사의 기로에 선, 인간 의식의 단면을 명료하게 뒤쫓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포로가 되어 움 속에 갇혀 있다가 하나씩 처형되기까지의 초조한 인간의 유예 상황을 박진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또한 전쟁이라는 비정(非情)의 극한 상황을 다루면서, 주제 의식과 문체가 적절한 호흡을 유지하고 있다.

 이 작품은 1950년대 전후 문학 중에서도 시기적으로 단연 선구적인 작품으로서,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작품 중 이색적으로 전쟁 이야기 그 자체의 성격보다는 전쟁 속에서의 인간의 의식을 추구하고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 따라서 당대 국내의 집중적으로 유행했던 실존주의적 휴머니즘 사상에 깊이 침윤되어 있는 흔적이 매우 강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몸을 웅크리고 가마니 속에 쓰러져 있었다. 한 시간 후면 모든 것은 끝나는 것이다.

 소속 사단은? 학벌은? 군에 지원한 동기는? 공산주의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미국에 대한 감정은? 동무의 말은 하나도 이치에 닿지 않소. 동무는 아직도 계급의식이 남아 있소.

 북으로 북으로 쏜살같이 진격은 계속되었다. 적의 배후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자주 본대와의 연락이 끊어졌다.

 후퇴다. 이미 길은 모두 적에 의하여 차단되었다. 점점 낙오병들은 늘어가고 소대원은 줄어든다. 눈 속을 헤매다 그들은 악전고투 끝에 가까운 어느 마을에 들어갔다. 먹을 것을 찾아보았으나 얼어빠진 감자 한 자루뿐 더 이상 아무것도 없었다. 모두 지쳐 쓰러졌다.

 밤이 온다. 새벽이 온다. 모든 것을 잊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눈을 헤치며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그에게 남은 전부였다. 다시 산으로 오르려다가 소개장은 총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산속을 헤매다가 적에게 생포된 소대장은 심문을 받았다. 그는 적의 대장에게 말하였다.

 “나는 기쁘오. 내가 한 개 기계나 도구가 아니었다는 것, 하나의 생명체의 임간으로 살아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으로 죽어간다는 것, 이것이 한없이 기쁠 뿐이오.”

 경멸 적인 조소가 입술에 어렸다.

 “이 뚝 길을 따라 똑바로 걸어가시오. 남쪽으로 내닫는 길이요. 그처럼 가고 싶어하던 길이니 유감은 없을 것이오.”

 그는 돌아서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걷기 시작했다. 불길을 뿜으려는 총구를 등뒤에 받으며 조금도 주저 없이 정확한 걸음걸이로 눈길을 맨발로 헤쳐가고 있었다. 의식이 자주 흐린다. 그 후 몇 번이고 심문이 지나갔다. 모든 것은 결정되었다. 이제 모든 것은 끝나는 것이다.

 눈이 함빡 쌓인 흰 둑길이다. 이 둑길을 몇 사람이나 걸었을 거냐. 휜칠히 트인 벌판 너머로 마주 선 언덕, 흰 눈이다. 가슴이 탁 트인 것 같다. 똑바로 걸어가시오. 총탄 재는 소리가 바람처럼 차갑다. 눈앞엔 흰 눈뿐. 아무것도 없다. 이제 모든 것은 끝난다. 끝나는 순간까지 나를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작품은 피살자(被殺者)의 심리를 분석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소대장인 ‘나’는 추위와 굶주림 속에 부하를 모조리 잃어버린 뒤 적군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사로잡히기 직전에 그는 총살의 위기에 처한 피해자를 구해 놓았다.

 괴뢰군들은 피해자에게,

 “이 둑길을 따라 똑바로 걸어가시오, 남쪽으로 내닫는 길이오, 그처럼 가고 싶어 하던 길이니, 유감은 없을 것이오.”

하고 그를 뒤돌아서게 하곤 총격을 가하려고 했다. ‘그’는 총을 꽉 움켜쥔 채 괴뢰군을 쏘아 죽인 뒤 총을 맞아 의식을 잃는다.

 죽음에 직면하면서도 기어코 한 사람을 구해놓고야 만 ‘그’의 의지는 초인적이다. 남을 살려놓은 대가로 자기의 죽음을 스스로 불러놓고도  ‘그’는 조금도 의지를 저상시키지 않는다. 불안 같은 것, 절망 같은 것은 그와는 전혀 인연이 없다, 오직 죽음을 향해 갈 뿐이다.

 

 

 이 작품은 철저하게 1인칭 독백 형식을 취하고 있다. 1인칭 독백 형식은 주로 과거 회상이 주조를 이루나 이 작품은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면서 주로 현재의 상황을 진술하고 있다. 즉, 전쟁의 극한 상황 속에서 한 인물이 경험하는, 인민군에게 잡혀 죽음을 눈앞에 둔,  '나'의 내면적 심리의 갈등이 '의식의 흐름'의 형식을 통해 제시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작품은 '죽음의 무미함과 전쟁의 비극성'을 드러내 준다.

 그 점에서 이 작품은 전쟁의 극한 상황 속에서 한 인물이 겪는 경험과 그 속에 명멸하는 생각들을 서술해 가는 의식의 흐름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같은 현재형의 진술은 작품의 템포를 아주 박진감 있게 전개시킨다. 또한, 이 작품은 서술로 일관되는 특징을 지닌다. 화자의 주변 인물의 대화도 화자의 의식 속에서 재편성되어 간접 화법으로 진행되고 묘사도 객관적이기보다는 화자가 바라본 주관의 세계로 그의 의식 속에서 재구성되고 있다.

 이 작품에서 '나'는 전쟁의 의미를 막연하게나마 이해하고 전쟁의 참혹함에 대하여 절망하여 전쟁 속에서 삶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는 인물이다. 이는 전후 세대의 공통된 인식이며 심리적 갈등이다. 이런 양상은 장용학의 <요한시집>, 이범선의 <오발탄>, 선우휘의 <불꽃> 등에서도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