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현대소설

정인택 단편소설 『우울증(憂鬱症)』

by 언덕에서 2024. 7. 5.

 

정인택 단편소설 『우울증(憂鬱症)』

 

정인택(鄭人澤. 1909∼?)의 단편소설로 1949년 9월 [조광]지에 발표되었다. 정인택은 <촉루>를 발표한 이래 40여 편의 소설을 쓸 정도로 왕성한 창작 활동을 했으나, 그가 월북 작가이고 친일 작가라는 이유로 세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이다.

 정인택의 작품은 대부분 1인칭 화자를 내세워 주인공 '내'가 자기 체험을 독자들에게 이야기하는 사소설 형식을 취함으로써 작가 자신의 주관적 이야기라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그의 소설의 주인공 '나'는 대체로 직업을 갖지 못한 룸펜 인텔리로서 무기력하고 허무주의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이러한 설정의 기저에는 가난과 실직 등의 사회적 현실과의 관계가 자리 잡고 있으며, 결론에서는 현실과 타협하는 지식인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한다. 정인택이 즐겨 사용하는 심리주의적 수법은 후에 현대 사회의 도시성을 그리는 작가들에게 기본적 패턴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정인택의 작품 세계는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의 초기 작품들에는 대부분 지식인의 무기력과 피로함, 그리고 소시민 생활을 소재로 하여 삶의 무력함과 의식 과잉의 세계가 그려져 있다. 단편소「우울증」이 바로 이러한 특징을 고스란히 지닌 작품이라 볼 수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나는 10여 일 전에 아무런 말도 없이 집을 나간 아내 생각을 하며 지난 1년 동안 아내와의 썩어 문드러진 생활을 기억해 낸다. 다방을 경영한 지 한 달이 못 되어 아내가 나를 따라 올라오자, 나는 전부터 의가 맞지 않던 늙은 어머니 및 누이와 아주 의를 끊다시피 하고 어두컴컴한 다방 속에서 둘이 처박혀 지냈는데, 어느 날 아내가 돌연 자취를 감춰 버렸다. 나는 아내를 부정하게 생각하며 다방을 처분하지만, 내심 자신의 처사가 부정한 아내에 대한 미련 때문이라는 생각에 쓰디쓴 쾌감을 느낀다.

 나는 앞일을 생각하니 까마득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예산도 서지 않고, 생각할 엄두도 나지 않는데, 생각마저 갈피를 잡기 힘들어 하루하루 잠으로 허송세월을 한다. 잠을 자는 동안은 일그러진 사고에 사로잡히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절친히 지내는 박 군이 찾아와서는 나의 두문불출을 비아냥거리자, 나는 박 군을 반갑게 맞으며 다방을 처분한 것에 대해 시원히 말을 해 버린다. 박 군은 동경에 가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하며, 이제 마음의 방황일랑 그만큼 해 두고 정신을 차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이내 나의 동생 순희에 대한 얘길 꺼낸다. 평소 박 군은 순희를 좋아했는데, 순희가 다른 남자를 따라 떠났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두 사람은 술잔을 기울이게 된다. 술을 마시다가 둘은 말이 없어지고, 이유 모를 불안을 느끼며 어쩔 수 없는 몸과 마음의 불안을 제어하기 힘들어지자, 밖으로 나와 거리를 거닌다.

 그러다가 박 군이 별안간 고함을 치며, 순희를 사랑했었다는 고백과 함께 뛰어 달아나 버리자, 나는 박 군의 심정을 헤아리며 평소 박 군이 자주 가는 바를 찾아간다. 테이블에 엎드린 채 잠이 든 박 군을 귀엽고 불쌍하게 생각하며 생활의 우울을 느낀다.

 잠을 깨어보니 나와 박 군은 어제 팔아 치운 가겟방 한구석에서 자고 있었다. 곰곰 생각해 보니, 박 군을 데리고 온 것이 나이고, 불도 때지 않은 맨바닥에서 넋두리 속에 잠이 들었으리라 생각하는데, 나는 언뜻 방바닥의 온기를 느끼고는 누군가 불을 때 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든다.

 내가 다시 잠에서 깨어났을 때, 언제나 경직된 표정의 어머니가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 어머니는 누이동생 순희가 만주로 달아났음을 알려주는데, 어머니로서는 너무 매정한 태도를 보인다. 나는 묘한 갈등을 느끼며, 문득 육친에 대한 애정을 느끼고 콧날이 시큰해지나, 어머니의 무정한 거절에 그만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아뜩함을 느낀다. 어머니가 가고 난 후 나는 갑자기 무서움을 느끼게 되자, 죽은 듯 자고 있는 박 군을 무작정 흔들어 깨운다.

 

좌에서 우로 김소운, 화가 이승만, 소설가 박태원, 정인택

 

  정인택은 [매일신보] [문장(文章)]지의 기자로 있었으며, 1930년 [매일신보]에 소설 <나그네 두 사람>을 발표, 문단에 등단 후 박태원(朴泰遠)ㆍ윤태영(尹泰榮)ㆍ이상(李箱) 등과 가깝게 지냈다. 이상의 단편소설 <환시기(幻視記)>에서 ‘송군’이 실제 정인택이라는 주장도 있다. 정인택은 이상(李箱) 김해경이 경영하던 카페 [쓰루(鶴)]의 여급 권순옥(權順玉)을 사랑한 나머지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매일신보]와 [문장사] 등에서 기자를 역임하였다.

 정인택은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2년 조선문인협회 간사,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간사, 1945년 조선문인보국회 소설부 회장 등을 역임, 친일적인 작품들을 썼다. 8ㆍ15 광복 후에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다가 6ㆍ25 전쟁 때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인택의 후기 작품들은 대개 일종의 신변 이야기들과 일상화된 애정 세계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 뒤 정인택은 일제 식민지 정책을 문학에 반영한 친일 문학의 성격을 띤 작품을 발표하게 된다. 정인택의 문학 작품들은 당대의 우리 지식인들이 가졌던 역사의식, 혹은 민족의식의 수준과 성격의 한계를 잘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식민지 시대의 지식인들이 자기의 신념을 보존하지 못하고, 크게는 민족 전체와 보이지 않는 독립이라는 묵시의 약속을 배반할 가능성을 내포한 것을 보여 준 예라 할 수 있다.

 정인택의 소설 중에는 한국 문학이 지녀야 할 주체적 조건을 상실한 것과, 일본의 모든 문화 역사 등에 대해 호의적으로 해석하고 표현한 작품이 대부분을 이룬다. 그의 작품들 속에는 무산자의 계급투쟁 논리나 이데올로기의 경향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가 북으로 간 사실은 아이러니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