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 단편소설 『수인(囚人)』
이기호(1972~)의 단편소설로 2006년 간행된 단편집 <갈팡질팡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에 수록된 작품이다. 작가는 등단 이후 소설집 <최순덕 성령충만기>,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가 독자들의 호응을 받으면서 2000년대 젊은 소설을 대표하는 작가군의 한 명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능청스러우면서도 익살맞은 문체와 내용으로 서사의 흡입력이 강하다는 특징이 있다. 전통적인 스토리텔링과 이야기성을 중시하면서 그 안에 해학적인 문체와 기발한 상상력을 잘 조화시키는 편이다. 성석제나 박민규 등과 비슷하다는 느낌인데, 좀 더 역사성이나 현실성이 강하면서도 장르적인 실험을 즐기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로 처음부터 끝까지 힙합 가사 식으로 쓰여진 <버니>와 조서 형식의 <햄릿 포에버>, 성경의 한 페이지처럼 써내려간 <최순덕 성령 충만기>를 들 수 있다. 2020년 [이상문학상]을 거부한 3인 중 하나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나’ 박수영은 사년 전 어떤 문예지의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신예작가다. 자수성가한 벤처기업인이나 자차제장의 선거에 나설 예비정치인들의 자서전을 대필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본격적인 글을 쓰기 위해 대관령 근처의 태기산 중턱에 십일 개월 들어간다.
세상과의 모든 소통수단을 끊은 채 산중으로 든 소설가 ‘박수영’이 채 두 달을 지나지 않았을 때 한반도의 남부지방 두 곳에 건설되었던 원자력발전소가 두 시간의 시차를 두고 폭발해버리는 사건이 생기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발전소 반경 사십킬로 안에 살고 있던 주민 대부분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방사능은 사백 킬로미터 이상 유출되었고, 전 국토의 칠십 퍼센트 이상이 낙진으로 뒤덮이고 말았다.
정부는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기에 골몰하였고, 정부의 노력과는 무관하게 사고가 일어난 지 일주일 만에 휴전선이 뚫려 오십년 이상 지속되었던 분단체제는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유엔은 남쪽 정부를 해산하고 국민들을 선별하여 세계 각지로 소개시키기로 하였던 바, 이 과정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선별작업이 이루어지게 된다.
태기산 중턱에 사는 ‘박수영’은 세상이 이렇게 변한 것도 모른 채 글을 쓰다가 발견되어 유엔이 파견한 심판관 앞에 서서 분류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세상이 요구하는 대형자동차 운전면허도 없고, 정보처리 기능사 자격도 없으며 소형 원동기 면허조차 없는 ‘나’는 아랍에미리트에서 원한다는 병아리 감별사 자격조차 갖추고 있지 않다. 할 수 없이 나는 마음껏 소설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던 프랑스로 자신을 보내달라는 청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자신이 소설을 쓰는 작가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지만 자서전을 대필하기 전에 딱 한 번 문예지를 통해 이름을 달고 쓴 작품은 서울의 교보문고 매장에 있다. 나는 방사능 낙진 피해방지를 위해 철저하게 봉쇄된 교보문고를 떠올리고 심판관들에게 며칠간의 말미를 달라고 한다. 내가 곡괭이를 들고 두텁게 메워진 교보문고의 종로측 출입구를 파내려간다.
작중 주인공 ‘내’가 곡괭이로 교보문고 출입구를 파는 모습은 이 시대 작가의 초상이기도 하며, 그에게 소설가임을 증명하라는 심판관들의 요구는 우리 시대 독자의 표상이기도 하다. 이십오 미터의 시멘트 덩어리를 파헤치는 소설 속 인물에게 심판관들은 거침없이 소설 쓰는 일 이외의 다른 재주를 요구하지만 ‘박수영’은 소설쓰는 일 이외에는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어서 묵묵히 자기 일에 전념한다. 그리고 마침내 오랜 날을 보내며 교보문고의 출입구를 열게 된 순간 심판관들은 드디어 박수영에게 소설 쓰는 일 이외에도 곡괭이질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동안 단단한 시멘트 덩이를 파헤치며 그 안에 혹시 자신이 남긴 소설이 없으면 어떻게 하는가를 고민하며 시멘트 덩어리를 부쉈던 작가를 보며 심판관들은 다른 재주의 확인을 한 셈이었던 것이다. 오래 시간 온갖 열정으로의 뚫었던 시멘트의 숲을 다시 되메우며 스스로 교보문고의 드넓은 매장으로 가기를 희망하는 소설속 인물을 통해 작가 이기호는 이 시대 작가의 단면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다.
♣
작중 주인공의 행위는 상징적이다. 삽질해서 굴을 파내는 일은 희망이 사라진 세계에 소설을 쓰는 것으로 대체된다. 쓸데없는 행동을 하거나 눈에 보이는 가치가 창출되지 않는 일을 할 때 우리는 ‘삽질하고 있네!’라고 말한다. 수영이 일 년 동안 태기산에서 소설만을 쓰는 행위는 유엔 사람들의 눈에 삽질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삽질로 그것으로 수영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수영에게 삽질하고 있네는 ‘소설 쓰고 있네’로 호환된다.
여기서 소설가는 이름이 없다. 소설 안에서 소설가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가는 이름을 강제로 삭제 당하고 이니셜의 인물로 등장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소설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재화를 만들어 냈다는 이유로 감옥 안에 갇힌 채 세계가 자신을 불러주기만을 바란다. 가슴에 수인 번호를 달고 묵묵히 삽질을 하고 앉아 있다.
작가의 소설가관은 별볼일없는 소설가가 원자력 발전소 폭발로 아수라장이 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교보문고를 뒤덮은 이십오 미터 시멘트벽을 곡괭이 하나로 뚫고 들어간다는 이 작품에 잘 표출되어 있다. 자신의 직업이 소설가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곡괭이질을 하지만 정작 그의 생존을 담보하는것은 바로 그 곡괭이가 상징하는 그의 노동력이다. 이 작품에 드러나 있는 것은 소설가를 만드는 것은 소설가이고자 하는 '의지'이므로 소설가는 직업이 아니라 하나의 상태라는 색다른 관점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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