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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최윤 단편소설 『회색 눈사람』

by 언덕에서 2024. 9. 19.

 

최윤 단편소설 『회색 눈사람』

 

 

최윤(崔允.1953∼ )의 단편소설로 [문학과 사회] 1992년 여름호에 발표되었다. 

『회색 눈사람』은 가난과 외로움에 처한 혈혈단신의 한 여대생이 1970년대 한 지하조직에 자발적으로 연루되어 겪은 내면의 풍경을 그린 소설이다. 소설 후반부에서 그녀는 대학을 아주 포기하고 이모에게 내려가 이모의 농사를 오랫동안 돌보는 것으로 나온다. 작중 주인공은 자기가 맛본 희망의 색깔을 주변과 나누려고 여러 가지 일을 벌이기도 하면서 조용한 삶을 산다. 이 소설은 사랑과 희망, 좌절과 배신을 담고 있으면서도 주인공의 입을 통해서는 단 한마디도 그런 감정의 격렬함이 묘사되지 않는다. 

 이 작품은 1990년대 문학의 한 부류로 분류되었던 이른바 '후일담' 소설로서 제23회 [동인문학상] 수상작이다. 서술자는 20년 전의 대학 시절을 회상하며 가난 때문에 고학하며 허덕이던 자신의 삶과 주변의 인물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작중 '나'가 과거를 회상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는, 뉴욕의 한 공원에서 숨진 채 발견된 어느 한 여인에 관한 신문 보도 기사 때문이다. (그 여인은 서술자 '나'의 여권을 위조해서 미국으로 건너간 김희진이었다.) 서술자에게 과거는 한 줄기 빛과 같은 희망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암울했던 시기였다. 안 씨를 비롯해서 인쇄소에서 일을 하던 그들(지하에서 운동을 벌이며 몰래 활동을 해 온 이들)과 가까운 곳에서 일도 하며 지냈던 나였지만, 결코 그들과 자신을 묶어 '우리'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없었을 만큼 그들을 잘 알지 못한 채 그들 곁을 서성였다. 이런 요인 때문에 '나'는 그들로부터 알게 모르게 상처를 입었다. 그들 무리에 쉽게 스며들 수 없었던 방외인(아웃사이더)의 아픔이었다.

 작중 주인공 '나'는 시대 현실이 불안한 시기에서 내면에서 중심을 찾고자 한다. 절제된 시어와 독백 같은 어투의 서술을 따라 서술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이 이야기는 저 먼 상상 속의 허구가 아니라 바로 우리 곁에서 볼 수 있고,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임을 알게 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나는 전직 교수의 저술을 위한 자료를 찾다가 사회면을 보고 깜짝 놀란다. 내 이름의 여권을 가진 여인이 아사(餓死)로 죽었다는 것이다.

 20여 년 전 나는 이모의 돈을 훔쳐 대학에 등록을 하고 하루하루를 먹고 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하고, 학기가 지난 책을 팔아서 연명하고 있었다. 청계천의 헌책방에서 내 책을 산다는 연락이 와서 만나게 된 안 씨 청년은 나의 딱한 사정을 알고 그가 경영하는 인쇄소에서 일하도록 해준다.

 한 학기를 휴학하고 인쇄소에서 종일 일하면서도 나는 안 씨의 정체를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그리움으로 인쇄소를 찾던 어느 날 밤, 나는 안이 지하운동의 멤버임을 알게 된다. 내가 자신의 뒤를 쫓는 것을 알게 된 안 씨는 인쇄소 일 대신에 지하조직의 일을 맡게 한다. 나는 지하조직에서 세 명의 사람과 일을 하지만, 내게 맡겨진 일 이외는 아무 것도 알려 하지 않고 그들 또한 알려주지 않은 채 성실히 일만 한다. 그런 한편으로는 미국으로 재가한 어머니가 마련해 준 초청장으로 여권을 신청해 놓는다.

 그러던 어느 날 조직이 발각되고 나는 초조와 불안과 그리움으로 그들 중의 하나를 기다린다. 드디어 안 씨는 김희진이라는 여자와 내 여권이 필요하다는 편지를 보낸다. 나는 그녀를 20일 동안 간호하여 미국으로 보낸다. 그 뒤 고맙다는 단 한마디의 엽서를 받는다.

 

 

「회색 눈사람」은 가난과 외로움에 처한 혈혈단신의 한 여대생이 1970년대 한 지하조직에 자발적으로 연루되어 겪은 내면의 풍경을 그린 작품으로 탐정소설을 연상시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설 후반부에서 그녀는 대학을 아주 포기하고 이모에게 내려가 이모의 농사를 오랫동안 돌보는 것으로 나온다. 그녀는 자기가 맛본 희망의 색깔을 주변과 나누려고 여러 가지 일을 벌이기도 하면서 조용한 삶을 산다.

 학문과 언론의 자유가 억압받던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으로, 개인에게 시대가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 보게 하는 작품이다. '나'는 사상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지하 운동에 거리를 두고 가담하지만, '나'에게 지하 운동의 경험은 인생 전체에 '희망'으로 기억되며 큰 영향을 미친다. 작중 주인공은 자발적으로, 또한 조직의 의도적인 차단 때문에 단 한 번도 조직의 중심에 접근하지 못한다. 그런 그녀가 그곳으로부터 아무도 모르는 희망을 발견하고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쳐 나가는 이야기이다. 조직을 이끌던 자들은 결과적으로 부귀와 영화를 누렸지만 표시나는 존재가 아니었던 그녀가 조직으로부터 아무도 모르는 희망을 발견하고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쳐나가는 줄거리는 아름답고도 허망하다. 우리 주변에 존재했으되 보이지 않았던, 늘 홀대받았던 무명의 전사들과 이념의 빛들, 그것을 드러내게 한 작가 최윤의 역량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작가는 새로운 감각과 서정성으로 큰 주목을 받으며 강렬하게 문단에 등장했다. 그의 문장들은 객관적 현실에 존재하는 고통을 그대로 껴안고, 그것이 개인에게 당도하는 모습을 선명하게 그려냄으로써 독특한 정서를 만들어낸다. 최윤의 소설에는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면서도 시대의 아픔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힘있는 섬세함이 깃들어 있다.

 이 작품은 자신을 둘러싼 공간, 나아가 자기 자신마저도 낯설고 두려운 존재로 만듦으로써 우리가 서 있는 일상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인간 존재의 근원적 불안을 자극하기 위함이 아니라, 세계와 인간의 관계 맺음을 치우침 없이 포착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사용된다.

 최윤은 그의 작품들을 통해 인간이 세계 또는 다른 인간과 단절되거나 분리되어 있지 않고,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역설한다. 인간 존재의 가장 내밀하고 약한 부분을 찾아내고야 마는 그의 치밀함은 위압적인 세계에서 개인이 치유될 수 있는 길을 차근차근 찾아나간다. 그럼으로써 개인의 상처를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고 공동체의 연대자로서 온전히 존재하는 방법을 모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