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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최윤 단편소설 『아버지 감시』

by 언덕에서 2024. 7. 1.

 

 

최윤 단편소설 『아버지 감시』

 

 

최윤(崔允. 1953~)의 단편소설로 1990년 [문학정신]에 발표되었다.

 작가는 1988년 광주민주화운동의 비극을 다룬 중편소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를 [문학과 사회]에 발표하면서 소설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벙어리 창(唱)>(1989) 「아버지 감시」(1990) <속삭임, 속삭임>(1993) 등은 이데올로기의 화해를,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1988) <회색 눈사람>(1992)은 시대적 아픔을, <한여름 낮의 꿈>(1989) <너는 더 이상 너가 아니다>(1991) <푸른 기차>(1994) <하나코는 없다>(1994) 등은 관념적인 삶의 의미를 다룬 작품으로서 그의 소설은 다분히 관념과 지성으로 절제되어 남성적인 무게를 지닌 작가로 평가된다.

 불문학교수와 문학비평가로도 활동하며, 이청준의 소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해외에 소개하는 등 번역가로도 활약하고 있다. 1992년 <회색 눈사람>으로 제23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하였고, 1994년 <하나코는 없다>로 제18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어린 두 아들과 만삭인 아내를 두고 월북했던 아버지, 그 때 어머니 뱃속에 있었던 내가 이 단편의 화자다. 나는 프랑스의 식물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정보과 형사들의 집요한 감시를 받고, 거주지를 옮길 때마다 신고를 해야 했던 어린 시절, 월북한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커다란 짐덩이었고, 어딜가든 무슨 일을 하든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망령이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고 아들들을 키워냈다. 나름 평온한 생활을 하던 3년 전, 가족들에게 중공에서 아버지로부터 발신된 편지가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다. 편지 왕래 끝에 월북한 아버지가 월북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재혼하여 2남 2녀를 두었고, 중공으로 다시 망명하여 그 곳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마흔이 다 되도록 결혼도 하지 못한 막내 아들을 따라와 프랑스에 와 계시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소식을 알게 된 후 처음에는 기뻐 하셨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신다. 화자는 외국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버지의 초청 책임을 맡게 되고, 아버지가 마침내 파리로 다니러 오신다. 아버지가 월북할 당시 어머니 뱃속에 있었으니 아버지의 얼굴을 알 리가 없었지만, 공항에서 화자는 단 번에 아버지를 알아보고 얼싸안고 눈물을 흘린다.

 아버지가 오시고 처음 몇 일은 후다닥 정신없이 지나갔지만,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 전혀 다른 세상에 살던 아버지와 아들이 느닷없이 만났으니 대화가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서울에 있는 형들이 오려면 아직 열흘도 더 남았다. 일주일이 지나자 불편한 침묵에 이어, ‘며느리 밑씻개’ 따위의 질문에 견딜 수 없어진 화자는 아버지의 망령 탓으로 어머니를 비롯하여 가족들이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아버지가 쫒아간 이념은 어떻게 된 것이지, 아버지가 갑자기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어머니께서 이렇게 쉽게 돌아가시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등의 벼르고 벼르던 말들을 술의 힘을 빌러, 아버지에게 뱉어버린다.

이런 아들에게 늙은 아버지는 의연하게 답하신다. 살아생전 어머니 앞에 무릎꿇고 용서를 빌지도 못하고, 아들들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는 지위에 오른 것도 아니지만, 뜻없이 건성으로 살지 않았고, 나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용서받기 위해 이 곳에 온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먼거리를 돌아 이 곳에 왔다...

 “내 보잘것없는 생애에 많은 우회를 거친 다음에 어렵게 이른 이 자리가 흡족할 뿐이다. 그리고 바로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을 너희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페르 라세즈 묘지’ 그 중에서도 ‘코뮌 병사들의 벽’으로 안내해 주길 부탁한다. 파리코뮌의 막바지에 정부군에 몰린 국민병들을 처형하고 묻었던 곳이다.

 아비의 젊은 날의 꿈은 씁쓸하게 좌절되었으나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거참 바람 한 번 극성스럽구나. 아직도 멀었냐? 아비가 물으니 아들이 대답한다. 이젠 거의 다 왔습니다. 아버지.”

 

 

 위의 소설에서 화자는 그 이야기 속의 상황과 운명을 이끌어가는 영웅적 능동성을 지니기보다는, 그 소설을 독자들에게 읽어주는 관찰자적 화자의 역할을 맡고 있다. 바로 그 화자 자신의 고통과 상처를 이야기할 때도 그 어조는 섬뜩하리만큼 냉정하다. 그 같은 냉정함은 현란하면서도 절제되어 있는 최윤 특유의 수사학에 포장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고통 속에서 길어올려진 미학의 위엄을 보여준다.

 이 작품 속에서 아버지는 체제를 이탈한 자가 으레 그러듯이 북을 비난하지 않고, 젊은 날 이념에 사로잡혀서 갔던 그 길을 개인으로서 견지해가는 의연한 ‘위엄’을 보인다. 그리고 각기 다른 세계의 삶은 살았던 부자는 화해가 아닌 이해의 길로 페르 라 셰즈 묘지를 안내하며 따라가며 끝을 맺는다.

 최윤의 소설은 언어에 대한 탐구이면서 현실에 대한 질문이고, 그 질문의 방식을 또 다른 방식으로 질문하는 방식이다. 그는 우리를 향해 여러 겹의 책읽기를 즐기라고 권유한다. 그의 소설은 이야기의 시간적 순서를 따라가는 독서가 아니라 그 이야기의 작은 부분들을 여러 층으로 쪼개서 그 이야기 전체의 의미를 독자 스스로가 완성하기를 기대한다.

 

 

 

 최윤의 소설들을 즐기는 방법은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는 사건의 선후관계를 의식 속에서 따라가는 것보다는 그 소설의 단락과 단락, 문장과 문장들 사이에 박혀서 보석처럼 빛나는 실존에 대한 통찰을 음미하는 것이다. 그의 소설에서 화자는 그 이야기 속의 상황과 운명을 이끌어가는 영웅적 능동성을 지니기보다는, 그 소설을 독자들에게 읽어주는 관찰자적 화자의 역할을 맡고 있다. 바로 그 화자 자신의 고통과 상처를 이야기할 때도 그 어조는 섬뜩하리만큼 냉정하다. 그 같은 냉정함은 현란하면서도 절제되어 있는 최윤 특유의 수사학에 포장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고통 속에서 길어올려진 미학의 위엄을 보여준다.

 황석영은, “역사가 아닌 아비, 망령이 아닌 사람”이라는 제목의 평에서 이 작품을 “내가 앞서 다룬 아버지를 잃어야 했던 남성 작가들 모두에게 권하고 싶다. 어째서 작가는 제목에서 아들과 아버지의 만남을 ‘감시’라고 왜곡시켜 말하는지 곰곰 생각해보아야 한다.”라며, 그는 이어서, “가장이 떠나고 원한과 그리움의 복잡한 갈등 속에 있는 어미와 아들들의 내면을 이렇듯 실감나게 깊이 있게 다른 작품이 드물고, 아버지와 아들이 외국에서 만나 한집에서 보내는 며칠이 이렇게 긴장 속에서 밀도 있게 묘사된 것에 나는 놀랐다.고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