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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서영은 단편소설 『사막을 건너는 법』

by 언덕에서 2024. 1. 19.

 

서영은 단편소설 『사막을 건너는 법』

 

 

서영은(徐永恩. 1943~)의 단편소설로 1997년 발표되었다.

 서영은은 1968년 [사상계] 신인작품 모집에 단편 <교(橋)>가 입선하고, 1969년 [월간문학] 신인작품 모집에 <나와 '나'>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1970년 단편 <단식> <뒤로 걷기> <연주회에서 생긴 일>을 발표하고, [한국문학]과 [문학사상] 등 문예지에서 오래 활동하였으며, 특히 1973년에 창간된 [한국문학]에 기자로 입사하여 발행인 김동리와 편집장 이문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83년 단편 <먼 그대>로 제7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하였고, 1990년 <사다리가 놓인 창>으로 제3회 [연암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96년부터 계간 [라쁠륨]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작품은 월남전에 참전한 후 삶에 대해 허무와 무력감에 빠진 ‘나’와 한 노인의 이야기를 통해, 삶의 허무감과 그것을 견디려는 노력을 다룬 소설이다. ‘나’는 열심히 살아가는 노인에게 자신이 느낀 허무감을 느끼게 하려고 하지만, 사실 노인은 그 허무를 잘 알고 있으며, 거짓을 통해 이를 견디려고 했던 것이다. 작가는 두 인물을 통해 인간 실존에 관한 주제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원래 미술학도(화가 지망생)였으나 월남전에 참전하여 을지무공훈장을 받고 돌아온 '나'는 제대 후 걷잡을 수 없는 무력감에 휩싸이게 된다. 죽음의 고비를 넘던 전장에서의 긴박한 순간에 대한 얘기를 애인인 나미에게 실감나고 절실하게 들려주는데, 정작 나미는 건성으로 들으며 관심을 보이지 않는 듯 여기며 실망하기도 한다.

 극도의 무력감에 빠져 있던 나는 어느 날 창 밖으로 공터를 내려다보다가 뽑기 과자를 만들어 파는 한 노인을 발견하는데, 그는 쓰레기와 물웅덩이 속을 헤치며 뭔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노인이 그토록 뭔가를 열심히 찾는다는 일 자체가 나의 무기력에 대한 도전인 것처럼 느낀 나는 견디다 못해 노인에게 접근한다.

 노인은 월남전에서 죽은 아들이 받은 을지무공 훈장을 손녀에게 가지고 놀라고 주었는데, 손녀가 훈장을 이 물웅덩이에서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노인의 희망과 의지를 꺾어 버리고 노인에게 삶이란 결국 허무한 것이란 점을 알려 주고 싶었던 '나'는 내가 받은 을지무공 훈장을 웅덩이에 몰래 숨기고 노인이 찾아내길 기다리지만 며칠이 걸려도 노인이 발견하지 못하자 나는 도와주겠다며 직접 웅덩이에 들어간다.

 웅덩이를 뒤지는 척하다가 훈장을 찾아들고 노인에게 건네지만, 노인은 노여움과 차가운 경멸로 흉악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하곤 돌아서서 가 버린다. 맥이 풀린 '나'는 이제껏 노인이 했던 이야기들, 즉 훈장을 실수로 잃어버렸다는 것, 어린 손녀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 아들의 개를 기르고 있다는 것 등이 모두 거짓말임을, 훈장을 가지고 놀고 싶어 하는 어떤 소년에게 들어서 알게 된다. 그제야 '나'는 자신이 정말 바보였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소설가 서영은 ( 徐永恩 . 1943~)

 

 소설 「사막을 건너는 법」은 ‘왜 사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며, 이 주제가 자전적인 일상과 만나 심화된 중편〈살과 뼈의 축제〉에서는 객관적 생의 조건과, 그에 대한 개인의 내면이 한바탕 전쟁을 치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관되게 세계와 맞서는 자세와 윤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서영은의 초기 소설들은 오늘의 독자에게 자신만의 질문과 답 찾기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작품 속 '사막'은 세상살이를 의미한다. '사막을 건너는 법'을 다시 말하면, '노인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노인은 아무것도 없는 현실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환상을 만들어내었다. 그렇게 해서 잃어버린 삶의 의미를 억지로 되찾는다. 그것이 바로 노인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 즉 사막을 건너는 법이다. 그런데 '나'가 비틀린 감정으로 노인의 삶에 개입해 그의 환상을 파괴해 버린다. 아무것도 없는 현실을 자각하게 된 노인은 훈장을 찾아 주었음에도 '나'에게 화를 내는 것이다. 그 이유를 모르던 '나'는 아이 덕분에 노인의 환상을 알게 된다. 덕분에 '나'는 '나는 정말 바보였다.'며 자신의 갈등이 노인 앞에서는 하찮은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작품에 한정지어 말하면, 사막이란 자신의 존재와 세상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무기력에 빠져 있는 상태이다. 그리고 사막을 건너는 법이란 그런 무기력을 이겨내기 위해 자기 스스로 허구의 목적, 목표를 만들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뜻한다. 작품 속에서 주인공이 모든 것이 낯설고 무의미하다고 느낀 상태가 사막이라면, 노인이 훈장을 찾는 일은 무의미함에서 의미를 만들어내는, 사막을 건너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단편소설 「사막을 건너는 법」에서 주인공은 월남에서 임무수행 중 적의 공격을 받아 순식간에 동료를 잃고 자신은 부상을 당했다. 그 덕에 무공훈장을 받고 제대하게 되었다. 하지만 삶과 죽음이 단지 우연에 의해 갈라서는 사건에 대한 경험은 주인공에게 실존의식을 갖게 했다. 그런데 문제는 실존의식을 통해 새롭게 드러난 세계와 자신의 의미가 이전보다 더 분명하고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오히려 더 이해할 수 없고 무의미하게 보일뿐이다. 이것이 「사막을 건너는 법」에서 주인공에게 모든 것이 낯설고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작가는 바위를 밀어 올리는 영웅 시지프가 아니라 동네 물웅덩이에서 무엇인가를 찾는 노인을 통해 새로운 방법을 보여준다.

 노인은 월남전에서 전사한 아들이 남긴 손녀딸, 그리고 한 마리 개와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그가 찾고 있는 것은 아들이 받은 훈장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주인공은 자신이 받았던 훈장을 물웅덩이에 숨겨놓았다가 다음날 노인 앞에서 건져내어 노인이 잃어버린 훈장을 우연히 찾은 듯 건네준다. 그런데 노인은 고맙다는 말은 고사하고 흉악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바보 같으니라고!”라고 쏘아붙인 다음 사라져 버린다. 도대체 무엇이 바보 같다는 것일까?

 알고 보니, 노인이 아들의 훈장을 물웅덩이 속에 빠트려 잃어버렸다고 한 것이나 손녀딸과 함께 살고 있다고 한 것, 그리고 기르고 있는 개가 아들이 키우던 것이라고 한 것, 모두가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노인에게는 그것이 사막을 건너는 법이었다. 아들이 전사한 이후, 아무 희망도 없이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노인에게는 설사 그것이 거짓말이 할지라도 바로 그것이 그를 살게 하는 힘이었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마치 그런 것처럼 살아가는 것’, 이것이 작가가 말하는 사막을 건너는 법이고, 삶을 사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