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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황순원 단편소설 『어둠 속에 찍힌 판화(版畵)』

by 언덕에서 2024. 1. 9.

 

 

황순원 단편소설 『어둠 속에 찍힌 판화(版畵)』

 

 

황순원(黃順元 1915∼2000)의 단편소설로 1952년 [신천지]에 발표되었다.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작가는 액자식 구성을 통해 사냥꾼 부부의 특이한 체험을 제시함으로써 생명에 대한 외경심을 일깨우고 있다. <목넘이 마을의 개>, <이리도>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동물에 빗댄 인간사를 다루는 작가의 솜씨를 접할 수 있다.

 간결하고 세련된 문체, 소설 미학의 전범을 보여주는 다양한 기법적 장치들, 소박하면서도 치열한 휴머니즘의 정신, 한국인의 전통적인 삶에 대한 애정 등을 고루 갖춤으로써 황순원의 작품들은 한국 현대소설의 전범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그의 소설들이 예외 없이 보여주고 있는 서정적인 아름다움과 소설문학이 추구할 수 있는 예술적 성과의 한 극치를 시현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소설문학이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데 주력할 경우 자칫하면 역사적 차원에 대한 관심의 결여라는 문제점이 동반될 수 있지만 황순원의 문학은 이러한 위험도 잘 극복하고 있다. 그의 여러 장편소설들을 보면,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충실하게 살려놓으면서 일제강점기로부터 이른바 근대화가 제창되는 시기에까지 이르는 긴 기간 동안의 우리 정신사에 대한 적절한 조명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작가 황순원만큼 일상적 제재를 허구적 윤색을 가미하지 않은 듯 담담하게 적고 있는 경우도 흔치 않다. 이 작품 「어둠 속에 찍힌 판화」에서도 잘못하면 운치 없는 한담(閑談)으로 떨어질 위험성이 많은 소재를 조촐하게 완성시켜 놓은 데서 작가의 솜씨가 잘 드러난다.

 

소설가 황순원( 黃順元 1915&sim;2000 )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ㆍ4 후퇴 직후로 추정되는 해, '나'가 피난지 대구에서 겪은 일이다. 이사 온 날 저녁 바깥 주인이 인사를 겸해 술상을 봐 두고 '나'를 부른다. 그는 말머리를 사냥 이야기로 돌린다. 전문 사냥꾼인 듯싶은 그는 아내의 눈치를 살피는 것으로 보아 사연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원래 그는 대구에서도 이름난 사냥꾼이었다. 지금부터 육 년 전, 결혼 십여 년만에 아이를 가진 부부는 태중에 좋다는 노루나 사슴피를 먹기 위해 함께 사냥에 나선다. 사냥을 나선 다음날 쉽게 노루를 잡아 피를 받아 마신다. 그러나 몰이꾼들이 고기를 먹기 위해 노루의 배를 가르다가 새끼를 밴 노루임을 발견하고는 수군거린다. 이 이야기를 들은 그의 아내는 갑자기 구역질을 하면서 마신 피를 토한다.

 그날 밤 아내는 애절한 노루의 울음소리를 듣고 무서워 남편을 깨운다. 남편은 낮에 잡은 노루의 수놈이라 판단하고 즉시 총을 들고나간다. 아내는 만류하다가 그 자리에 쓰러진다. 그날 밤으로 여섯 달 된 아이를 유산한 아내는 그 후에도 임신을 하지만 계속 5~6개월이 되면 유산하게 된다. 첫 유산 이후 남편의 사냥을 말리던 아내는 남편이 말을 듣지 않자 사냥 도구 일습을 어디엔 가 없애 버린다.

 이야기를 마친 사내는 몰래 감춰 둔 사냥용 총알을 담은 상자를 가져와 자랑을 한다. 그러나 그의 아내가 들어오는 기척에 황급히 감추어 버린다. 남편이 나간 사이 그녀는 남편이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모두 알지만 모르는 척하고 있다고 '나'에게 말해 준다. 순간 '나'의 머릿속에는 어둠 속에서 조그만 상자를 들고 그것을 감출 장소를 찾는 중년 사내가 그려진 한 장의 판화가 떠올랐다.

 

1952년판 종합잡지 [신천지]

 

 황순원은 한국 사실주의 문학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세부묘사 같은 것은 대담하게 생략하고 이미지 전달에 주력한다. 초기 소설인 <별><소나기> 등의 작품에는 애수와 정감, 생의 비애들이 간결한 수법으로 잘 다루어져 있다. 인간의 본능이나 직관의 세계를 다루며 인간에 대한 신뢰를 표현하며, 순수하고 아름다움의 동경이 주된 소재인 서정적 세계를 다루었다. 사건의 급박한 흐름은 거의 없고 심리묘사와 분위기 조성으로 사건을 이끌어 가는 특징을 보여 준다. 6ㆍ25를 분수령으로 후기에는 보다 사회적인 방면으로 시선을 돌려 현대 문명의 역기는, 세태 묘사, 예민한 현실 감각을 보이고 있다.

 이 작품은 피난지 대구의 어느 집에서 전직(前職)이 사냥꾼인 한 사내에게서 듣게 되는 경험담이다. 어쩌면 한 사내의 넋두리에 불과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작가는 이것을 특유의 필치로 재구성하여 가슴 뭉클한 감동을 주고 있다. 이 소설의 핵심은 내부 액자 형식으로 전달되는 주인 부부의 과거사이다. 신비스럽기도 하고 비과학적인 이야기 같은 주인 사내의 경험담을 통해 작가는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일깨우기에 성공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자연과 인간의 관계만을 그린 것은 아니다. 주인 사내와 그 아내의 태도는 소설은 역시 인간의 문제임을 말해 준다. 먼저, 사냥에 대한 사내의 애착, 아이가 없는 상황에서 아내의 거듭된 유산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며 그 원인은 분명 자기 탓이었다. 그럼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그 태도야말로 과연 '나'에게 하나의 '판화'로 남을 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또한, 아내의 속 깊은 마음 역시 인상적이다. 아직도 사냥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남편이 안쓰러워서 사냥 총알을 감추는 것을 모르는 척 눈감아 주는 그녀의 그 깊은 뜻을 '나'는 헤아리지 못한 것일까? 자연의 섭리가 늘 어둠 속에 감춰져 있듯이 그들 부부의 미묘한 내면 심리도 논리적 판단의 세계는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의 제목 '어둠 속에 찍힌 판화'는 더욱 이채롭다. 그러나 작가는 이 소설의 무게 중심을 생명에 대한 외경감 쪽에다 두고 있다. 마지막 문장인 "어둠 속을 몇 장의 신문을 안고 돌아온 우리 두 어린것의 이불자락이라도 여며 주고만 싶었다."가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종합 월간지 [신천지]  :

 

신천지(新天地)는 서울신문에서 발간하였던 잡지로 1946년에 창간한 1946년 서울신문사에서 『매일신보』 후속으로 발행한 시사적인 성격의 잡지다. 한국전쟁이 일어나 휴간하였다가, 1951년 12월 속간한 뒤 다 일시 휴간을 한 후 1954년 12월부터 다시 속간하여 1954년 말까지 발행을 계속하였다.

 1946년 1월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이던 『매일신보(每日申報)』가 『서울신문』으로 바뀌면서 『매일신보』의 허물을 조금이라도 더 씻기 위하여 이 잡지를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크기는 A5판, 면수는 창간호만 148면이었으며, 평균 220면을 웃돌았고, 때로는 300면이 더 될 때도 있었다. 일반 월간 잡지들은 창간되었다가는 몇 호 만에 폐간된 경우도 많았으나 『신천지』만은 서울신문사의 힘으로 꾸준히 발행되어 한국문화계에 큰 영향을 끼치며, 지식층의 호응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6·25 전쟁이 일어나 부득이 휴간하였다가 1951년 1월에 한 권을 내고, 다시 휴간하였다. 1951년 12월 속간하였다가 일시 휴간을 한 후 1954년 12월부터 다시 속간하여 1954년 말까지 발행을 계속하였다. 더욱이 『신천지』는 서울신문사의 중역들과 편집국장·문화부장까지 참석하는 편집회의를 열어 그 회의의 결정을 서울신문사의 출판국장이 실행에 옮기도록 되어 있어서, 시사적인 감각과 국제적인 감각이 고루 반영된 균형 있는 내용으로 짜여 있다는 평을 받았다. 출처: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