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창섭 단편소설 『설중행(雪中行)』
손창섭(孫昌涉, 1922~2010)의 단편소설로 1956년 4월 [문학예술]에 발표되었다.
손창섭은 식민지의 자식으로 태어나 10대 때 중일전쟁(1937)을 겪었고, 20대 때 태평양 전쟁을 겪었으며, 30대 때 한국전쟁을 겪었다. 그에게 인류가 자랑하는 이성(理性)과 역사는 철저하게 회의될 수밖에 없었으며, 근대사회를 지탱하는 최소한의 휴머니티, 시민성 개념, 문명 개념은 붕괴할 수밖에 없었다. 이 상태에서 그는 전후 사회의 극단적인 인물유형을 창조해 내는데 그것은 ‘동물적 인간’이다.
그 결과, 손창섭은 식민지의 백성, 광복 후의 혼란, 6ㆍ25라는 민족적 비극 속에서 육체의 불구와 비정상적 삶을 살아가는 인물의 현실 밑바닥을 어둡고 침통하게 파헤쳤다. 그는 병적일 만큼 날카로운 자의식과 가난ㆍ고독 속에서 문학 활동을 했으며, 비사교적이며 외고집적인 천성으로 문단의 기인으로 알려졌다. 그의 작품은 사회의 어두운 면에서 자라난 인간과 이상 인격의 인간형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의 문학은 거센 전쟁이 휘몰아간 폐허의 상황을 반영하여 짙은 허무와 불안, 무의미한 인생의 인식에서 출발하여, 부조리와 반항적인 입장을 끝까지 지켰다.
병들어 있는 삶의 조건에서는 병들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래서 그의 작품 속에 나오는 인물들은 비정상적인 인간관계, 병적인 도착심리로 가득 차 있다. 그 인물들은 모두 현대인의 병든 내면세계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절박한 현실의 그들에게는 미래의 자유보다도 오늘의 생존이 더 절실한 것이다. 독특한 그의 문학은 당시 문학관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무면허 병원에서 근무하던 관식이는 병원이 문을 닫게 되면서 갈 곳이 없게 되었다. 관식이는 얼마 전 길에서 우연히 만났던 중학교 은사 고 선생의 셋방에 기거할 수 있도록 신세를 지자고 했다. 고 선생은 반대했지만, 일주일만 있겠다는 관식의 사정에 끝내 수락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고 선생이 혼자 사는 셋방살이에 식객이 들었다. 그러나 관식은 얼마간 지내겠다고 한 약속 기간을 지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고 선생의 물품을 함부로 사용하는 등 사사건건 고 선생에게 맞섰다.
관식은 어느 날 가무잡잡한 소녀를 데리고 왔다. 연극을 하고 희곡을 써보고 싶다는 귀남이라는 지적인 소녀였다. 귀남은 가끔 자고 갔는데 갑자기 관식과 함께 고 선생의 셋방에서 신세를 지겠다고 했다. 귀남에게 호감을 가진 고 선생은 쾌히 승낙했다. 세 사람이 한 방에 기거하게 되었는데 잠자는 모습을 지켜보던 고 선생은 귀남의 손을 만져 보았다. 입술에 살짝 입맞춤하기도 했다. 너는 내 딸처럼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어느 날 귀남은 “전 선생님의 신세를, 키스로 갚아도 좋아요. 세상에 공짜란 없으니까요!”라고 말했다.
어느 날, 관식이가 웬 여인을 데리고 왔다. 동대문에서 화장품 도매상을 하는 돈 많은 여자라고 했다. 여자는 고기랑 찌갯거리를 사 오게 해서 저녁을 차렸다. 관식이는 고 선생에게 화장품 사장이랑 결혼을 종용했다. 화장품 사장이 고 선생을 맘에 들어한다는 것이다. 관식이는 화장품 사장을 데리고 오겠다고 뛰쳐나갔다. 고 선생이 그녀와 결혼하면 자신에게 사업자금이 생기리라는 속셈이었다. 관식을 붙잡지 아니한 고 선생은 놀랐다.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자신을 의심해 보았다. 그런데 아랫목에 누워 신문을 보던 사회면에 '미모의 화장품상 여인 피살, 돈 때문이냐? 사랑 때문이냐?'라는 기사가 보였다. 고 선생은 귀남에게 신문을 보였다. 그 여자였다. 화장품 도매상 여인이 살해당하고 만 것이었다.
관식이 긴장해서 돌아왔다. 관식은 고 선생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 그 여자와 고 선생이 약혼한 사이라고 주장해서 한몫 뜯어내자는 것이다. 순간, 관식의 뺨에서 짝 소리가 났다. 학생 머리 한 번 쥐어박아 보지 못한 고 선생이었다. 관식이가 나가고 장례식을 구경하고 싶다는 귀남이도 그곳으로 갔다.
고 선생은 까닭 모를 분노와 울분이 치솟았다. 알 수 없는 분함이었다. 평생 처음 부당한 모욕을 당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고 선생은 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다. 고 선생은 한강을 끼고 길 없는 언덕을 눈 속에 그냥 혼자서 걸어갔다.
이 작품은 6.25 전쟁이 막 휴전했을 때 쓰인 것으로 보인다. 전쟁 후 갈 곳이 없어진 사람들이 서로 속이고 속는 장면들이 전개된다. 손창섭의 여느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 단편에서도 무기력하고 우유부단한 주인공이 등장한다. 주인공 고 선생은 과거 자신의 제자였다는 사실 하나 대문에 관식이라는 정체불명의 청년을 식솔로 맞이할 수밖에 없다. 관식은 일주일만 있겠다는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고 선생의 재산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등 갈데없는 자신을 돌보아주는 스승을 기망하고 무시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그는 귀남이라는 처녀까지 데리고 와서 자신의 방에 기거하게 만든다. 이후 관식은 돈 많은 여자와 고 선생을 중매시키려 하지만 그 여자는 피살되고 만다. 관식은 그 여자가 죽었으니 한몫을 뜯어내기 위해 죽은 여자의 약혼자를 연기하라는 제자의 뺨을 때린 후 분을 삭이기 위해 눈 내리는 언덕을 걸어간다. 아무리 세상이 삭막해도 지켜야 할 것이 있다는 인간 본연의 자세를 제자가 무시하기 때문이다.
♣
손창섭은 1950년대의 불안한 사회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인간에 대한 모멸과 자조, 극도의 절망과 궁핍 등 부정으로 가득 찬 시각으로 인간의 실존세계를 다룸으로써 종래의 한국소설과는 구분되는 독특한 작품세계를 확립한 작가이다. 이 작품에서 고 선생은 작가 자신의 현신으로 판단된다. 손창섭이 쓴 대부분의 작품에서 작가 자신부터가 꿈도 희망도 없었던 성격으로 보인다. 손창섭은 주로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삶을 살다가 파국을 맞고야 마는 현대인을 그려내었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 아무리 행복한 사람이라도 몇 시간 동안은 충격과 무력감에 빠져 있을 수밖에 없다는 지적은 일견 타당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예외가 있듯이 이 작품은 좀 다르다. 비참한 현실이지만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 윤리는 지켜야 사회가 유지된다는 작가적 양심이 보이는 작품이다. 손창섭의 대표작으로 불리며 전후 사회에 희망의 불빛을 던진 1958년에 쓴 다른 단편 <잉여인간>처럼 현실에 굴하지 않고 저항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여러 모로 문제적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의 주인공 고 선생은 <잉여인간>의 주인공 서만기 원장으로 가는 징검다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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