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석 희곡 『성난 기계』
극작가 차범석(車凡錫.1924∼2006)의 희곡으로 1959년 [사상계]에 발표되었다. 1951년 [목포문화협회]에 희곡 <별은 밤마다>를 발표한 뒤로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밀주(密酒)>가 당선되어 정식으로 등단했다. 이어 발표한 <껍질이 깨지는 아픔이 없이는>(1960)에서는 자유당 때의 부정부패를 자세히 파헤쳤으며, 사실주의 희곡의 최고봉이자 희곡 작법의 교과서로 꼽히는 그의 대표작 <산불>(1962)에서는 6ㆍ25전쟁으로 꿈이 깨져버린 젊은이와 그를 둘러싼 애증을 그려냈다. 전통적 개성이 뚜렷한 사실주의극을 썼으며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민족분단을 객관적으로 그려냈다.
이 작품은 단막 희곡으로, '기계'처럼 냉정하고 인간미 없는 한 의사가 더욱 비정한 인간에게 '분노'를 느끼면서 인간적인 모습, 즉 인간성을 회복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양회기는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온 폐 전문 의사이다. 어느 날, 인옥이하는 여자가 진료를 받으러 온다. 연초 공장 포장공으로 일한다는 그녀는 폐 수술을 해 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X레이 검사 결과 그녀의 상태는 수술을 할 수 없을 만큼 악화되어 있었다. 회기는 수술을 거부했지만, 그녀는 가족을 위해서라도 꼭 살아야 한다고 수술을 간청한다. 그러나 회기는 그녀가 너무 가난한데다가 중환자여서 수술의 결과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냉정하게 돌려보낸다.
잠시 후 그녀의 남편 상현이 회기를 찾아온다. 그는 회기에게 수술을 거부한 것에 대해 치하하며, 아내의 폐 수술을 해 주지 말 것을 거듭 당부한다. 이유인즉, 없는 돈에 어떻게 결과도 불분명한 폐 수술을 하겠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내의 바람끼도 이야기한다. 설령, 아내가 수술을 받아서 정상인이 된다고 해도 부정하게 놀아날 것인데 돈을 들여서까지 수술을 해 주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이다. 결국, 그런 여자는 죽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회기는 그의 이기주의적 비정한 태도에 분노한다. 남편의 행위는 간접 살인이라고 주장하며 인옥을 살려 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회기는 간호원에게 인옥이 희망하면 수술을 해 주겠다는 내용의 속달 우편을 보내도록 지시한다. 기계처럼 빈틈없고 비인간적인 회기가 상현의 부도덕한 태도에 충격을 받아 인간적인 모습을 회복한 것이다.
이 작품은 기계 문명 속에서 소외되고 비인간화되는 세태를 고발한 리얼리즘 경향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에서는 전체의 전환과 결말 부분을 옮겼다. 이 작품은 원래 1950년대 [사상계]에 발표한 작품인데 본래 차범석의 작품들은 사회성이 강하다. 사회에 대한 폭넓은 관심은 그로 하여금 변천하는 사회를 그때그때 작품에 수렴하게 한다. 유치진에 의해 "밀주(密酒)"로 추천을 받은 그는 지속적으로 리얼리즘을 고집하며 변천하는 현실을 작품에 그대로 담았다. 그의 작품은 제재의 폭이 매우 넓지만 그것들은 대체로 몇 갈래 나누어질 수 있다. 가난한 서민들과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의 삶, 문명의 발달로 인한 인간성의 상실과 인간의 소외, 인간의 애욕의 갈등과 정치의 허위성, 구세대와 신세대의 갈등과 그에 따른 전통적인 것의 몰락 등이 그가 주로 다루어 온 주제들이다.
그러니까, 차범석이 이처럼 문명 비판적인 작품을 몇 편 썼는데, "성난 기계"를 비롯하여 "계산기"와 "분수"가 바로 그런 계통의 작품이다. "계산기"가 전후의 실업․빈곤 문제를 기계 문명 발전과 관련시켜 파헤친 작품이라고 한다면, "성난 기계"와 "분수"는 인간성 상실 문제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이들의 공통점은 현대인의 소외와 고독이다. 현대 기계 문명에 의한 개인의 소외는 인간성 상실로까지 확대되는 것이다.
♣
이 작품은 인간성의 상실과 그 회복의 가능성을 다루고 있다. 즉, 물질문명으로 인한 인간성의 상실을 휴머니즘으로 극복하는 차범석 문학의 한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주인공은 가난한 여환자의 폐 수술을 냉담하게 거부한다. 성공의 전망이 불투명한, 그것도 가난한 환자의 수술을 했다가 책임을 질 수 없는 상황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목전에 둔 한 인간의 호소가 먹혀 들어가지 않는 기계적인 인간의 모습이다. 이렇게 이 작품의 전반부는 인옥의 인간적인 호소와 회기의 기계적 대응이 대립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작품의 후반부에 와서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남편이 찾아와서 자기의 아내를 죽게 내버려 달라고 뻔뻔스럽게 비인간적인, 비윤리적인 요청을 하자, 회기의 가슴 한켠에 잠재해 있던 인간성이 살아난다. 비인간성에 더욱 극단적인 비인간성이 부딪치자 '작용․반작용의 법칙'처럼 오히려 주인공의 인간성이 회복하게 된다. 결국, 주인공의 '기계' 같은 삶의 태도가 더욱 저열한 인간형을 만나 '성난 기계'가 됨으로써 잠재된 참모습을 되찾게 된 것이다.
'세상의 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우리페데스 희곡 『메데이아(Medeia)』 (0) | 2024.07.20 |
---|---|
유치진 희곡 『마의태자(麻衣太子)』 (0) | 2024.07.18 |
차범석 희곡 『태양을 향하여』 (1) | 2024.07.04 |
에프라임 레싱 희곡 『미스 사라 샘슨(Miss Sara Sampson)』 (0) | 2024.06.28 |
클라이스트 희곡 『깨어진 항아리(Der Zerbrochene Krug)』 (2) | 2024.06.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