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의 어원
‘레지’는 다방에서 차를 나르는 아가씨이다.
“이거 봐, 레지. 커피 하나에 홍차 하나.”
“그 다방 레지, 그거 쓸 만하게 생겼더라. 사람됨됨이 사근사근하고, 인사성이 있고, 말이지.”
차를 따라주는 ‘레지’의 얼굴과 손길 따라 차 맛이 달라진다고 말하는 사내도 있다. 차 맛이 달라지기야 할까마는, 정신적으로 피로해 있는 상황에서 상냥한 응대와 함께 차를 따라 줄 때, 그 쌓였던 피로를 몰아내 줄 수는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미운 얼굴보다는 고운 얼굴이 좋고 교양 없이 구는 것보다는 세련된 태도로 대해 주는 것이 더욱 좋다 할 일이다.
우리의 생활 구조가 다방에 드나들게 되어 있어서 반드시 차를 마시러만 가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빌러 가는 경우도 많은 것인데, 그러자니 레지들과 얼굴이 익어가게 된다. 직장 주변의 레지들은 꼭 직장 동료와 같은 생각이 드는 것도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대하기 때문이리라.
‘레지’라는 말이 어디서 왔느냐니까, Lady(숙녀)에서 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레이디’는 ‘레디’로 되기 쉽고, ‘디’는 또 ‘지’와 가까워서 ‘레이디-레디-레지’를 거친 ‘레지’ 아니겠느냐는 데서였다. 아닌 게 아니라 ‘레지’들은 숙녀이어서 그런 생각이 반드시 황당무계하다고 할 수만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register(레지스터 : 기장계)'쪽을 끌어대는 것이 훨씬 타당한 것으로 된다. 반드시 다방뿐 아니라, 음식점이나 술집에서 자동금전등록기를 다루어 기장(記帳)을 맡고 있는 사람이 있고, 그들을 '레지스터'라 하는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들이 차도 나르고 또 기장도 하고 하는 사이에 차 나르는 아가씨를 일러서만 '레지'라고 하게 되었던 것이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레지스터’의 ‘스터’가 떨어지는 것은 특히 외래어의 경우 용혹무괴(容或無怪) 한 일이어서 그걸 가지고 굳이 문제 삼을 수는 없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예를 들면 알 수 있게 될 일이다.
▷텔레비전 : ‘텔레비’라 하다가 그것도 길어서 그냥 ‘TV’라 하는데, ‘티비’는 폐결핵을 이르는 ‘tuberculosis’를 이를 때도 쓰니 어감이 좋진 않다.
▷프로 :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인다. ① 프로그램 : 순서 ② 프로페셔널 : 직업적 ③ 프로센토 : 퍼센트 ④ 프로덕션 : 영화 제작소 ⑤ 프롤레타리아 : 무산자(無産者) ⑥ 프로스티튜트 : 매춘부 ⑦ 프로퍼갠더 : 선전
▷아파트 : 어파트먼트. 즉 아파트.
이 밖에 ‘아마(추어)’, ‘어나(운서)’, ‘스피그라(스피드그래픽)’ 들이 모두 줄어든 채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반드시 ‘레지’만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코큰이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자기들 나라의 ‘레지스터’에 연유한 차 나르는 아가씨, ‘레지’를 보게 될 때 한 나라의 연어가 다른 나라로 가서 음과 의미 내용이 달라진 채 쓰이는 것을 실감하겠거니와 ‘레지’라는 말은 그저 삼인칭으로나 쓸 일이고, 정작 레지에게는 김양, 박양, 미스 김, 미스 박 같이 부르든지, 아니면 ‘아가씨’ 하고 부르는 쪽이 듣기에도 좋을 것 같긴 하다.
- 박갑천 : <어원수필(語源隨筆)>(19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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