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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한가위ㆍ보름’의 어원

by 언덕에서 2024. 2. 23.

 

‘한가위ㆍ보름’의 어원

 

 

 

요즈음 도시의 한가위야, 중천에 뜬 ‘아폴로’에 처녀성까지 침범당한, 멋없는 달 그것밖에 더 있는가. 그건 여느 보름달과 다름이 없으며, 특별한 뜻이 곁들여 있지도 않은 평범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농촌에서의 어린 날을 가진 이라면 ‘더도 덜도 말고 가윗날만 같아라.’는 의미를 알게 된다. 들판의 곡식들은 익고, 김ㆍ밤ㆍ대추 같은 과일이 따가운 볕에 주황빛으로 물들어가는 가운데, 아낙네의 떡방아 찧는 소리가 신나고, 산들바람 때문인가, 하늘은 마냥 높아만 가고…….

 [王旣定六部中分爲二 使王女二人各率部內女子 分朋造黨 自秋旣望 每日早進六部之庭 積麻 夜分而罷 至八月十五日 考其功之多少 負者置酒食 以謝勝者 相與歌舞 百戱皆作 謂之嘉俳] - <삼국사기(三國史記)> ‘유리왕(儒理王) 구년조(九年條)’ -

라는 기록이 있다. 신라 초에 여공(女功)을 장려하기 위해 나라 안의 여자를 두 패로 갈라 7월 15일부터 길쌈의 경쟁을 붙여서 만 1삭이 되는 이날에 그 우열을 가리는데, 진 편이 이긴 편에 주식을 바치고 곁들여 추모가 놀이로 즐기던 유풍(遺風)이 곧 한가위라는 것이고, 중국의 기록에나 일본의 기록에도 이러한 것이 비치고 있다.

 그러나 기록이야 어떻든 간에 농(農)을 천하의 대본으로 삼았던 데서, 오곡백과가 무르익은 기쁨을 자연과 조상에게 감사드리면서, 겸하여 무예를 겨루고, 다른 재주를 겨룸으로써 흥취를 돋우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그건 그렇더라도 한가위의 ‘가위’가 한자인 ‘嘉俳’로 표기됨은, 물론 ‘가외’ 같은 우리 옛말을 한자로 차음(借音)한 것일 뿐이다. 그러기에 ‘가배ㆍ가외ㆍ가위’ 같은 표기도 보이는 것인데, 지난날의 ‘입술 가벼운 소리(순경음)’은 ‘ㅂ’과 ‘ㅇ’ 쪽으로 갈려 현대로 내려오고 있음은 다 아는 일이다.

 ‘가배’는 결국 ‘가밧’ 같은 발과 같아서 ‘가운데’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던가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까 오늘날에도 ‘가웃’은 ‘절반’의 뜻을 지녀서 ‘한 되 가웃’, 혹은 씨름에서 비기는 일을 ‘가웃’이라 하거니와 그 ‘가웃’과도 같은 줄기의 말이 아니었던지. 그래서 지방에 따라서는 ‘가윗날’이라는 말 외에도 역시 ‘가웃날’ 같은 말이 쓰이는 것이었다. 결국 ‘한가위’는 ‘한가운데’였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는 정우얼과 8월의 보름을 양대 명절로 한다는 것인데, 정월의 ‘보름’에 대하여. 8월은 ‘가운데’로, 즉 ‘8월의 가운뎃날’로 명절을 삼아, 계절적인 행사를 벌였던 것이라 생각된다.

 ‘보름’은 반드시 정월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달에도 쓸 수 있는 것이어서 ‘二月ᄼ 보로매, 아으 노피 燈ᄼ블 다호라.’(動動) 같이 쓰였던 것이어니와 정월의 보름에 대해서는 특별히 ‘대보름’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래서 다른 보름과 다른 ‘특별히 크고 밝은 보름’, 즉 명절이었다

 정월 15일의 새벽에 아이들이 까서 먹는 생밤ㆍ호두ㆍ땅콩ㆍ잣 따위를 통틀어서 '부럼'이라고 하며, 까먹고 난 이 깍지를 버리게 되면 한 해 동안 부스럼을 앓지 않는다고 믿는 민속이 있었고, 옛 문헌에 이날 먹는 것들을 '腫果'ㆍ'消腫果'라 하는 것이 보여 '부럼'과 '부스럼'이 연관된 듯이 생각되기도 했지만, 이는 이(齒)를 단단히 하기 위한 민속이었다는 말이 있는 것과 함께 근거를 가진 것이 아니고, 다만 ’보름(부럼)‘과 ’부스럼(름)‘의 근사한 은에서부터 연유된 때문에 붙여본 말이 아니었던가 생각게 해 준다.

 ‘보름’은 한자로 이를 때 ‘望’자로 쓰였다. 중세어에서는 ‘보롬’이었다. 그러니 본디 뜻은 ‘바라옴 → 바람’과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오늘날에도 방언과 표준말 사이에서 볼 수 있듯이 ‘ㅏ’와 ‘ㅗ’는 같은 밝은홀소리(양성모음)로서, 무관하게 왔다 갔다 하는 언어관습이었다.

 이를테면, ‘파리 ↔ 포리’, ‘팥 ↔ 퐅’, ‘말 ↔ 몰’, ‘밝다 ↔ 볽다’와 같이, 지난날일수록 그 한계가 더욱 불분명한 것이었다. 지금도 전라도 쪽으로 내려가면, 넋을 잃고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상태를 가리켜 “뭘 보고 있느냐?”고 말하는 것을 듣는데, 오늘날의 ‘바라다(眺望ㆍ願望)’도 ‘바라다’ 쪽과 왔다 갔다 했었을 가능성을 비쳐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보름’은 ‘바라봄’이었다. 신비롭기만 한, 해의 아내인 달, 그것이 한 달 중 가장 크고 밝게 비치는 날, 어떤 소망을 실어, 또는 그 아름다운 신비에 도취되어 바라보게 되었던 것이었으리라.

 

 

 

- 박갑천 : <어원수필(語源隨筆)>(19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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