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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설ㆍ살'의 어원

by 언덕에서 2024. 2. 8.

 

'설ㆍ살'의 어원

 

  

중국 당대(唐代)의 유명한 시인 유정지(劉廷芝)의 시에,

 [年年歲歲花相似 歲歲年年人不同]

 (해마다 꽃은 그 꽃이언만 해마다 사람은 같지 아니하네.)

라는 대목이 있어서 오늘날에도 덧없는 인생을 빗대어 곧잘 인용되곤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작품은 송지문(宋之問)의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유정지는 송지문의 사위였는데, 그 시가 하도 그럴싸해서 장인이 그것을 달라고 했으나, 불응하므로 죽여버렸더라는 이야기와 함께.

 유정지의 시에는,

 [今年花落顔色改 明年花開復誰在]

 (올해 꽃이 지니 용태가 변하누나. 내년 꽃 필 때 뉘라서 그 꽃과 함께 있을 수 있다 하겠는가.)

하는 것도 잇는데, 전자와 궤(軌)를 같이 한 채, 역시 인생의 무상(無常)을 노래하고 있다.

 나이 드는 것은 설운 일이고, 또 인간이 나이 들어감에 따라 핑핑하던 살갗이 쭈그러드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사람에게 있어서도 마음 아픈 쓰라림이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그 시인들의 영탄에 세월이 어찌 사정을 두겠는가. 흘러 흘러서 옛 인걸들은 스러져 갔다.

 설이 즐거운 것은, 열 살 남짓 할 때까지의 어린 날뿐이었다. 색동저고리 입고 동네 어른들께 세배를 돌고 오면 주머니는 두둑해졌다. 어느 집이건 간에 떡이 있고 엿이 있고 곶감이 있고 웃음과 축복만이 있었을 때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제 세뱃돈 내주는 처지로 되어서는 설이 무서워진다.

 육당 최남선에 의하면 ‘설’에는 ‘섧다’는 뜻 외에 ‘조심하여 가만히 있다’라는 뜻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해가 바뀐 정월 초하루에는 1년 내내 아무 탈 없이 지내게 하여 줍소서 하는 소망이 곁들이게 되어 ‘설날’은 곧 ‘조심하는 날’로 통한다는 것이었는데, 한문으로도 ‘원단(元旦)’ㆍ원조(元朝)‘ 같은 말 말고 '신일(愼日)'이라고도 쓰는 것은, 삼가는 날이라는 뜻이 있어서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해순(全海淳)님은 그 말밑을 달리 찾아보고 있다. 한자의 ‘立’ 혹은 ‘建’에서 출발된 것이 아니었겠느냐 하는 생각이 그것이다. ‘立’과 ‘建’은 서로 뜻이 통하는 글자이고, ‘立’이 ‘설립’, ‘建’이 ‘세울 건‘자이니, 그 으뜸꼴 '서다'라는 ’서‘에 전성어미(轉成語尾)의 관형사형인 ’ㄹ‘을 더하여 '설'이라는 말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立春大吉’이네, ‘建陽多慶’ 같은 춘첩자(春帖子)의 ‘立’이나 ‘建’도 그런 데에 바탕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보았다. 설은 그야말로 마음이 설(서야 할) 날이었던 것이기도 하리라.

 언젯적부터의 설이었든, 또는 무슨 말 어떤 뜻에서의 출발이었든 ‘살(年)’과 ‘설(歲)’이 같은 개념 속에 포괄되어 있는 우리말은, 다른 나라 말보다 한결 더 박진력을 지녔다고 할 것이다. ‘정월 초하루’와 ‘나이’를 결부지었기 때문의 말이다. 오늘날처럼 ‘몇 살’을 먹은 것이 아니라, ‘몇 설’을 먹은 것이 지난날의 우리말이었다. 그것이 후세로 내려오면서 이른바 홀소리구름(모음전환: ablaut) 현상으로 갈려 쓰이게 되었다 뿐이다.

 우리 중세어에서 그런 꼬투리를 더듬어 캐어 보자.

 '세설 머근 손자를 머기더니'(<삼강행실도>), '큰 아들은 아홉서레 비치 말가니(<분류두공부시언해>)', ‘닐굽설부터’(<불정심타라니경언해>)의 경우, ‘설’이 ‘살’을 뜻하고 있음을 보인다. ‘살’이라는 말이 안 쓰였던 것은 아니지만, 훨씬 옛날에는 ‘설’로만 쓰던 것이 벌써 중세에 이르러선 ‘살’로도 쓰이기 시작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말하자면, ‘설’을 쇠면서 동시에 ‘설(살)’을 먹게 된 것이었다.

 반드시 육당의 생각뿐 아니라, ‘서럽다’나 ‘섧다’는 이 ‘설’과 관계 지어진 말이라 생각된다. 당 나라 유정지가 아니더라도 입 달린 시인 묵객은 양(洋)의 동서를 막론하고 세월의 흐름을 설워했기 때문의 말이다.

 

- 박갑천 : <어원수필(語源隨筆)>(1974) -

 

 


 

전해순(全海淳) : 국문학자, 저서로 「표준국문학사」(영문사, 1969)가 있다.

 

 

최남(崔南善.1890∼1957) : 사학자ㆍ문학자. 서울 생. 본관 동주(東州: 鐵原). 호 육당(六堂). 자 공륙(公六). 아명 창흥(昌興). 세례명 베드로. 육당은 많은 영역에 걸쳐 활약한 근대 한국의 가장 뛰어난 저술가의 한 사람이다. 그는 1904년 유학생으로 도일하였으나, 곧 귀국하였고, 두 번째 도일에서 와세다대학 고등사범 지리역사과에서 수업하고 이듬해 귀국하여 [신문관(新文館)]을 세우고 [소년](1908년 11월)을 간행했다. 이어 [광문회]를 설립하고, [청춘](1914)을 발간했으며, 1919년에는 유명한 대문장인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초하였다. 한때 신문사에도 관여했으나, 역사를 깊이 연구하여 유명한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1925)을 썼다. 시조에는<시조유취(時調類聚)>(1928년 고시조모음) <백팔번뇌>(1926), 기행문으로 <심춘순례(尋春巡禮)>(1926)가 유명하다. 육당이 한국 근대문학에 찬연히 이름을 드러내는 것은 1910년대의 그의 활동에서이다. 구체적으로는 [소년] [청춘] 등의 잡지 발행과 그것에 집필한 그의 문장력과 관련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소년]지는 육당과 분리시킬 수 없다. 육당 곧 [소년]지이고, 그 역(逆)도 진(眞)이다. [소년]지는 1908년 11월에 창간되어 1911년 5월에 폐간된, 도합 23권을 낸 바 있는 평균 60페이지 정도의 월간 종합지이며, 그 부수는 1천 부 정도로 알려져 있다.(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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