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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안회남 중편소설 「농민의 비애」

by 언덕에서 2024. 1. 27.

 

안회남 중편소설 「농민의 비애」

 

 

 

월북작가 안회남(安懷南. 1909∼?)이 1948년 [문학]에 발표된 중편 소설로 해방 후 미군정이 일제 때의 공출 제도를 부활시킴으로써 농민들의 생활이 더 비참해지는 현실을 다룬 작품이다.

 이태준, 박태원, 이상 등 구인회 동인들과 함께 활동을 했던 안회남의 초기 작품은 심리 묘사 위주로 신변을 다룬 사소설(私小說)이 주를 이루었으나, 이후 급격한 경향의 변화를 보인다. 태평양 전쟁 기간 중에 일본에 1년가량 징용으로 끌려갔다 온 후로는 이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냈고, 월북 이후로 추정되는 1948년 발표된 중편인 「농민의 비애」는 미군정의 폭정으로 농민들의 생활이 일제 강점기보다 더 비참해지고 있다는 사회 고발적인 내용이다. 제목 그대로 해방이 되었음에도 점점 더 궁핍해지는 농민의 삶과 그 비애를 그리고 있다. 착하고 성실한 서대응 노인이 왜 자살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읽을 필요가 있다.

 안회남은 광복 후 좌익 계열 문학 단체인 조선문학건설본부에 이어 조선문학동맹 결성에 참가하여 소설부 위원장을 맡았다. 1947년경에 월북하였고, 한국 전쟁 시기에 종군작가단에 참가하여 서울에 왔다가 박태원, 현덕, 설정식 등 아직 월북하지 않고 있던 문인들과 함께 북조선으로 돌아갔다. 1960년대 숙청되었다는 설만 있을 뿐, 1954년경까지의 활동만 확인되었고 이후 행적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소설가 안회남 (安懷南.1909∼?)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서대응 노인은 밥 한술 얻어먹을 생각으로 이선달네 집 앞까지 눈을 치우지만 별 소득이 없다. 노인은 손녀를 데리고 최만돌의 집에 가지만 그 집에서도 호박죽 외에는 내놓을 것이 없다.

 서 노인은 육십 평생 쌀밥 한 그릇 배불리 먹지 못하고 살아왔다. 일본으로 쌀이 공출되기에 더욱 그랬다. 해방이 되고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가난은 서노인만의 일이 아니다. 최만돌은 구장집 행랑살이를 하면서 밤에는 야학을 연다. 면사무소에서 한글을 모르는 사람들의 일을 봐주지 않기에 야학에 와서 모두들 열심히 배운다. 서노인도 제법 글을 쓰게 되었다. 야학을 끝내고 오던 서노인은 노루를 발견하고 잡으려 하지만 지쳐 쓰러지고, 마침 다니러 왔던 개가한 며느리(영이 어머니)가 발견하여 치료한다. 영이가 엄마와 같이 살고 싶다고 하자 어쩔 수 없이 어머니에게 보낸다.

 며칠 후 서 노인의 시체가 발견된다. 영이 어머니의 새 남편 김월봉은 징용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사람인 데, 아내가 도망치고 없자 그녀와 새로운 인연을 맺는다. 서노인이 죽자 서 노인의 집으로 이사한 그들은 노인이 경작하던 이선달의 논에서 얼마쯤 얻을 것을 기대했으나 이 선달은 품삯만 주고 만다. 마침 면사무소 창고에서 벼 가마니를 내가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몰려든다. 공출로 실려 가는 것이라 농민들은 길을 막는다. 관청에서 나온 사람들은 농민들에게 배급할 쌀을 찧기 위한 것이라 속이고 벼 옮기는 일을 강행한다. 버티던 농민들은 길을 비켜 주며 언젠가는 자신들이 먹을 수 있기를 기대할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사냥꾼의 총소리와 함께, 서노인이 남기고 간 빗자루와 나막신 앞에 노루가 쓰러진다.

 

▲ <탄갱> 4회 삽화 광부와 탄광숙소(왼쪽),&nbsp;<탄갱> 3회 삽화 탄광부들(오른쪽) 안회남 글, 정현웅 그림

 

 안회남의 문학세계는 광복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광복 이전 그의 문학세계는 흔히 ‘부계(父系)의 문학’이라고 불린다. 이 부계의 문학은 소설가였던 아버지 안국선의 영향과 그에 대한 흠모의 결과이다. 이 시기 그는 신변체험과 관련된 소설들을 많이 썼고, <명상>처럼 자신의 아버지를 직접 소설 속에 등장시키기도 했다. 광복 이후 작품 성향은 다시 둘로 나뉜다. 하나는 작품집 <불>에 수록된 단편들처럼 징용 체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들이고, 다른 하나는 <폭풍의 역사>(1947) 및 「농민의 비애」와 같이 역사의 흐름과 현실의 문제를 직시한 새로운 성향의 작품이다.

 '먹는다는 것이 이렇게 절실한 문제로 실감 있게 형상화된 작품이 드물다.'는 평을 받기도 했던 이 작품은, 해방 직후 풍요로움의 기대가 좌절된 후, 소작농을 대표하는 서대응 노인을 통해 당대 농촌 현실의 비참한 상황을 생존권의 차원에서 그려 낸 수작이다. 주인공 서 노인은 해방 이후에도 경제적인 궁핍을 극복하지 못하게 되자 자살의 길을 택한다. 기대 좌절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이 아니라 고통의 내적 수용이라는 체념적 방식을 여실하게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서 노인의 죽음을 단순히 가난에서 온 것이라 할 수는 없다. 가난에 이은 혈육의 단절도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아들은 징용에 끌려가 해방이 되어도 소식이 없다. 혼자 있는 며느리는 개가를 했다. 유일한 혈육인 손녀를 데리고 살던 노인에게 가난은 무서운 것이었다. 게다가 손녀 영이마저 며느리에게로 보낸 후 노인은 혈혈단신이 된다. 가난 그리고 없어진 혈육, 바로 이것이 서 노인을 죽음으로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서 노인의 삶과 함께 이 작품에서 돋보이는 것은 당대 우리 농촌의 현실이다. 자신의 땅을 갖고자 하는 소작농들의 기대가 가능해 보였던 해방 직후의 현실이 끼니를 때우고 구차한 목숨을 연명해야 했던 일제 강점기의 삶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그 현실은 "논을 주마."라는 한마디 말로 표현된다. 농민들은 농사짓고 소작료만 바치는 것이 아니라 땅을 얻기 위해서, 또 땅을 부쳐먹는 죄로, 지주에게 반 종노릇까지 해야 하는, '농촌에서도 왈행랑'이라 부르는 착취를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서 노인의 삶의 고통이 구체적으로 현실에 매개되지 않은 채 작가의 관념으로 노출되는 결함을 안고 있는 이 작품은, 특히 쌀 배급 문제, 쌀 파동 등이 당대의 전형적인 인물이나 현실 상황과의 상호 연관 속에서 서술되지 않고, 작가의 직접적인 개입에 의해 비판되는 한계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