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현대소설

손창섭 단편소설 『공휴일(公休日)』

by 언덕에서 2023. 12. 4.

 

손창섭 단편소설 『공휴일(公休日)』

 

 

손창섭(孫昌涉. 1922∼2010)의 단편소설로 1952년 [문예] 지에 발표되었다. 손창섭은 평양에서 태어났으며, 만주로 건너갔다가 그 뒤 도일(渡日)했다. 교토(京都)와 도쿄(東京)에서 고학으로 몇 군데 중학교를 거쳐 니혼대학(日本大學)에 수년간 다녔다. 1946년 귀국하여 교사잡지사 편집기자로 활동했다그가 집필생활을 시작한 것은 1949년 <얄궂은 비>를 [연합신문]에 연재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1952년에 단편 「공휴일」, <사연기(死緣記)>, 1953년 <비 오는 날> 등을 각각 [문예]지에 추천받고 문단에 데뷔한 후 <혈서> <미해결의 장(章)> 등을 계속 발표했으며, 1955년 <잉여인간>으로 [동인문학상]을 받았다.

 그의 소설은 그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소설의 형식을 빈 작가의 정신적 수기’이며 ‘☞도회(韜晦) 취미를 띤 자기 고백의 과장된 기록’이다. 그러나 그의 소설이 그 자신을 주로 묘사하고 있다고 해서 1930년대에 유행한 신변소설류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신변소설의 특징인 사소한 사생활이나 친구 간의 우정은 그의 소설에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저명인사들이 나타나지도 않는다. 그의 소설에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 ‘과장되어’ 계속 드러나고 있을 뿐이다.

 그 자기 고백적인 소설의 기조를 이루고 있는 것은 부정적 인간관이다. 이것은 비극의 원인을 신의 희롱에 둔 고대 그리스의 인간관과 상통하며, 그 자신의 개인사와 식민지ㆍ 해방 후의 혼란, 6ㆍ25라는 연쇄적인 카오스 상황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듯하다. 따라서 그의 소설의 주인공들이 대부분은 정상적인 정신과 육체, 정상적인 삶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소설가 손창섭 ( 孫昌涉 . 1922-2010)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도일은 은행원이다. 도일에는 도숙이라는 여동생이 있고 여동생의 친구 아미가 등장한다. 아미는 도일에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며 미국 유학 예정인 청년에게로 떠난다. 아미가 결혼한다고 보낸 청첩장을 읽은 도일은 청춘을 묻어 버리는 한 구절의 장송문(葬送文)을 떠올린다.

 도일은 여동생의 친구 금순이라는 처녀와 약혼을 한 단계이지만 도저히 결혼에 흥미가 없다. 그리고 아이를 낳아서 부모님처럼 사랑을 줄 자신도 없다. 금순이는 부끄럼을 많이 타는 아가씨였지만 약혼을 한 후에는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도일의 방을 스스럼없이 방문하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도일은 아미의 결혼식에 가기를 조르는 금순을 간신히 돌려보낸 후 일시에 전신의 피로를 느낀다.

 도일은 여자의 육체에서 큰 매력을 못 느끼었기에 자기의 감각을 한탄하는 일조차 있었다. 그러던 중 술자리에서 여자 뱃가죽의 신비스러운 이야기를 듣는다. 그래서 도일은 결혼하려면 자주 결혼식을 보아야 한다고 청하는 금순이에게 뱃가죽이나 만져 보게 해달라고 말한다. 그러자 금순은 다리를 꼬집고 눈을 흘긴다. 수줍던 처녀가 어느새 자기 방에 기척도 없이 드나들게 되고 다리를 꼬집고 눈을 흘기게까지 되었으니 결혼하면 자기의 신경을 분질러 버릴지도 모른다고 도일은 생각한다. 따라서 하루라도 빨리 파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편 아미의 결혼식은 엉망이었다. 식이 시작되자 어린애를 업은 젊은 여자와 그의 어머니인 듯한 노파와 그의 오빠인 듯한 청년이 살기등등한 기세로 뛰어들어 결혼식은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도숙은 오빠와 헤어져서 다른 남자와 결혼을 뽐내던 아미가 꼴이 보기 싫었는지 웃고 떠든다. 한편 그 소식을 들은 도일은 눈빛이 반짝이였고 어머니도 혀를 끌끌 찼다. 도일은 결단성이 부족한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아미와 결혼을 도모한 남자의 배짱에 현기증을 느낀다.

 도일은 금순이와의 관계가 미꾸라지와 붕어 새끼의 결혼처럼 생각이 되어 저도 모르게 숨을 몰아쉰다. 몇 분 뒤 도일은 양복을 입고 구두끈을 맨다. 금순이네 집에 간다는 말을 들은 어머니는 할머니도 계시고 아이들도 있으니 무엇을 사서 가라고 말할 때 문을 닫고 나간다. 아들이 나가자 어머니 얼굴은 환하게 주름이 펴졌지만, 도일은 그동안 속으로만 다짐해 오던 파혼을 선언할 용기가 생겼다고 제 딴에는 자신하며 집을 나선다.

 

1950년대 서울 풍경

 

 손창섭의 초기 단편들은 주로 심신장애자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으며, 후기 단편들은 비정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인간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폐병환자ㆍ잘름발이ㆍ간질 환자ㆍ위장병 환자 등이다. 이들의 거처인 ‘우중충한 동굴’, ‘빛없는 동굴’, ‘거적만 깔았을 뿐인 마루방’이다. 그리고 그 동굴을 둘러싼 ‘비 오는 날’, ‘어슴푸레한 등잔 밑’, ‘비 내리는 밤’ 등이 말하고자 하는 부분은 ‘우연히’ 살아있는 인간이 지니는 허망한 의미를 발견한다는 바로 내용이다. 이러한 허망함의 발견은 ‘까닭 모를 모멸과 일종의 반항’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이 소설에는 손창섭의 작품 중 극히 예외적으로 평화로운 가정이 등장하나 이는 겉모습일 뿐이다.  등장인물의 내면은 사고가 정상적이지 않거나 전쟁으로 인해 상처를 받아 심한 장애를 앓고 있다.

 또한 이 작품에 나타나는 전후 사회의 풍속도로써, 일본 혹은 미국에 대한 작가의 이유 없는 부정적인 태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미국을 보면, 첫 작품인 「공휴일」에서 도일의 약혼녀인 아미는 '미국 유학의 장래'가 약속된 청년에게로 달아난다. 미국은 그녀에게 우월적이고, 주인공 도일에게 열등감을 유발하는 곳이기도 하다.

 

 

 손창섭의 소설에 등장하는 3∼4인의 인물 중 한 명은 어김없이 육체적ㆍ정신적 불구자이며, 다른 인물들은 현실에 적응 못하는 정신적 불구자들이다. 이 작품도 별반 다르지 않다. 주인공 도일은 정신적으로 황폐해서 삶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인물이고, 옛 애인은 금전만능주의에 빠져  사기 결혼을 당하는 여자이며 여동생과 약혼녀도 삶의 의욕이나 목표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삶은 일을 하지 않는 '공휴일'에 불과한 인생이다.

 모두가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삶의 중압감에 짓눌려 "그냥 견딜 수 없이 뻐근한 상태일 뿐"인 '살아 있음'을 다만 포기하지 않을 뿐, 살려는 의욕을 완전히 상실한 인물들의 세계는 "먹고, 배설하고, 자는 일 외에는 고작 잡담만이 공식처럼 날마다 되풀이되는" 감방과 동일하다. 이런 점에서 감방 또한 정상인의 생활공간과는 동떨어진 '공휴일'과 같은 곳이며 그들은 인간동물원에 수용된 짐승들이다.

 소설마다 방이 나오지만 그것은 생활과 휴식의 공간이 아니라 그들의 끝없이 침전하는 무기력을 수용하는 밀폐된 동굴이다. 또 그들에게는 살아야 할 뚜렷한 이유도 없듯 죽어야 할 이유도 없다. 충격적인 인간형이다. 손창섭 이전의 소설은 인간을 짐승과는 다른 가치 있는 존재, 이상적인 존재로 보고 그 바탕 위에서 고민하고 싸우는 인간을 탐구하려 했다. 손창섭은 이에 정면으로 맞서, 이를 뒤엎고 전혀 새로운 인간형을 창출해 내었다. 1920년에 잉태한 한국 현대소설은 손창섭의 전후 소설에 이르러 드디어 그 의식이나 기법 면에서 현대 소설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도회(韜晦) : 재능이나 학식 따위를 숨겨 감춤.≒도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