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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이청준 단편소설 『줄광대』

by 언덕에서 2023. 12. 6.

 

이청준 단편소설 『줄광대』

 

 

이청준(李淸俊. 1939∼2008)의 단편소설로 1966년 [사상계]에 발표되었다. '단편소설「줄」'로도 알려져 있다. 이청준은 창작의 동기를 독자에게 보여줌으로써 공감대를 확장하려는 기법을 즐겨 사용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이런 기법은 대체로 액자소설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데 단편소설 「줄광대」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지만, 액자의 모습을 약간 변형시키고 있다.

 이청준은 기성 윤리가 전후의 젊은이들에게 얼마나 허황한 것인가를 천착함으로써 오늘의 우리 시대가 처한 도덕적 또는 기질적 의미를 탐구한 작가이다. 이러한 그의 주제 의식은 지나간 시대의 유물이나 다름없는 장인들이나 오늘에 살더라도 정상인이기를 굳이 기피하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하거나, 왜 글을 못 쓰는가라는 질문을 소설가를 내세워서 직접 질문하는 방식으로 나타낸다. 이러한 그의 의도는 ‘격자소설’이라는 그의 독특한 양식의 빈번한 사용으로 더욱 효과를 거둔다. 즉 그는 일견 복잡해 보이는 ‘격자소설’이라는 형식을 통해 인습에 함몰되어 있는 가부장적 전통사회와 그 사회의 해체 과정에서 파생된 난파된 개인의 문제를 분석한다. 그의 소설은 주인공이 내면에서 캐어나가는 자아의식의 성장을 그 소설세계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단선적인 전개가 어렵고 중층적인 구조의 도입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이 작품은 서두에서 사건 현장에 와 있는 작중 화자인 ‘나’를 먼저 제시하고 그다음에 창작의 동기를 밝히는 액자가 배치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청준 ( 李淸俊 .1939-2008)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일상에 묶여 무력하게 살아가던 ‘나(남기자)’는 ‘승천한 줄광대’에 관한 기사 취재를 위해 C읍으로 내려간다. C읍이 나와 관계되는 것은 이력서와 호적초본뿐이었지만 부장은 내게는 고향이니까 취재하라고 지시한다. 나는 광주에 내려서 대강 아침을 먹고, 다시 C읍행 버스를 탔다. C읍은 광주에서 네 시간을 버스를 타고 가야 했는데, 20년 만에 찾아온 나의 고향이라고 하는 땅은 무척 생소했으며, 나는 이 C읍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 같았다.

 나의 취재내용이 부장이 어딘가에서 들은 이야기(승천한 줄광대가 있고, 상당히 근거가 있는 이야기여서 재미있는 기사 거리가 될 수 있을 테니 취재해 오라는 것)였으므로 나는 그다지 꼭 취재해야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C읍으로 들어가는 버스에서도 내내 잤고, 여관에서도 내처 잠만 잔다. 그리고 여자를 사기 위해 나갔다가 우연히 ‘승천 장의사’라는 간판을 보게 된다.

 다음 날 나는 ‘승천 장의사’를 찾게 되고, 간판 이름의 내력을 듣게 된다. 그것은 이 C읍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라고 한다. 6.25 사변이 있기 몇 해 전 C읍에 서커스단이 들어왔는데, 그중에서 줄광대 한 사람이 좀 특별했다고 한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줄에서 떨어져 죽고 마는데, 그가 죽은 얼마 뒤부터 사람들이 그가 승천해 갔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 서커스단은 C읍에서 파산을 하여 다른 단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떠났으나, 트럼펫을 불던 사내만이 폐가 못쓰게 되어 이 C읍에 남아있다고 한다. 그러나 장의사의 주인은 그(트럼펫을 불던 사내)는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는데, 그래도 굳이 만나보고 싶으면 찾아가 보라며 주소를 일러 준다. 결국, 나는 사내를 만날 아무런 계략 없이 어떻게 되겠지 하는 생각 절반과, 까짓 싫다면 그만두라지 하는 생각 절반으로 약도를 따라갔다. 악취가 풍겨 나오는 방 안에서 나는 예전에는 서커스단에서 트럼펫을 불었으나, 지금은 거의 폐인이 된 사나이에게서 줄광대 ‘운’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 남자(운)의 어머니는 운이 두 살 나던 겨울, 단장과의 부정을 의심받고 남편에게 목 졸라 죽임을 당했으나, 운은 그 사실을 모르는 채 자랐으며, 나이에 맞지 않게 말이 없었다. 운은 아버지 허 노인에게서 줄타기를 배운다. 허 노인은 부인의 죽던 그날 하루를 빼고는 죽을 때까지 줄을 타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로, 줄타기 한 길만을 걸어온 장인이다. 아들 운에게 5년 동안 연습을 시키고도 사람들 앞에서 줄을 타지 못 타게 했다. 아직 자신이 생각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허 노인이 줄에서 발을 한 번 헛디딘 적이 있었는데, 그다음 날 운은 마침내 장인의 경지에 오른다. 그날 밤으로 운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줄에 올랐고, 허 노인은 자신이 이루어 놓은 전생애를 떠넘겨 주려고 했다. 그는 운과 함께 줄을 타다가 떨어져 죽는다.

 이후 운은 그의 아버지처럼 줄 위에서 재주를 부리지 않아 단장에게 꾸지람을 듣는다. 그런 어느 날, C읍에서 공연을 하고 났을 때, 운은 어느 여인에게서 꽃다발을 받는다. 그리고 며칠 뒤부터 운은 여인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줄 위에서 재주를 부린다. 그러나 그 여인이 사랑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줄 타는 모습이라는 것을 알고 줄 위에 올라 최후의 연기를 한 뒤 스스로 떨어져 죽는다.

 트럼펫을 부는 사내는 나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는 것을 끝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트럼펫을 불던 사내의 장례행렬에서 내가 C읍에 와서 며칠 동안을 같이 잔 여자를 보게 된다. 이 혼동 속에서 나의 소재를 확인해 볼 수 있는 방법을 영영 찾을 수가 없을 것 같아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서 이 이야기는 아주 죽어버릴 것인지, 또 누구에게로 가서 그 사람의 질서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인지는 조금만 더 생각을 해봐야 될 것 같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이 작품은 내부 이야기의 줄광대와 외부 이야기인 ‘나’ 사이에 어떤 의미를 주어 보려는 의도에서 창작된 것처럼 보인다. 나팔수가 들려주는 줄광대 이야기가 핵심적인 사건이지만, ‘나’에 관한 이야기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나는 단순한 이야기의 전달자가 아니라 줄광대 사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줄광대」는 이청준의 다른 작품 <과녁>이나 <매잡이>와 동일한 주제 의식에서 쓰인 작품이다. 이들 작품들은 사라져 가는 문화적 유형을 추적하는 내용을 공통적으로 보여 준다. 줄광대, 늙은 궁수, 전설적인 매잡이가 각 작품의 주인공인데, 이제 이들은 누구도 잘 돌아보지 않는, 전 시대의 유물쯤으로 생각되는 자기 직업에 대한 의식이 투철한 사람들이다. 시대 감각에 맞지 않는 직업이므로 이미 그들의 직업은 그들의 생계를 유지시켜 주지 못한다. 그들은 현실적 안목으로 보면, 낙오자의 부류에 들지만, 그들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줄광대」는 이러한 없어져 가는 장인들의 가려진 세계를 인텔리의 눈으로 조명해 보려 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것은 작가의 회고적 취향에서 온 것은 아니다. 또 그들 세계의 비밀을 캐내려고 하는 것만도 아니다. 장인(匠人) 세계의 독특한 생활 방식과 의식에 호기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작가가 장인 세계를 즐겨 다루는 정작 이유는 그들을 통해 현대인, 특히 지식인들이 상실해 가고 있는 가치 의식을 확인해 보려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현대인의 동일성 회복의 가능성을 장인의 세계를 통해 진단해 보고자 하는 것이 이 작가의 의도이다.

 현대인은 끊임없는 외부의 간섭과 억압으로 인하여 개성을 상실하고, 자기 방식의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사대에 살고 있다. 자기 본연의 모습을 찾을 겨를도 없고, 찾게 내버려 두지도 않는다. 이것이 현대인의 불행이다. 자기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 시대에 그래도 자기를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줄광대, 늙은 궁수, 전설적인 매잡이들이다.

 

 

 이 작품은 나(남 기자)의 취재 과정에 허 노인 부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구조이다. 핵심적인 사건은 허 노인 부자, 그중에서도 허운의 사랑과 죽음이다. C읍에 전설처럼 전해오는 ‘승천 이야기’를 취재하러 나선 내가 승천의 주인공인 허운에 대하여 허운과 함께 있었던 나팔수로부터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내가 함께 잔 그 창녀는 바로 허운의 딸일 가능성이 높으며 그녀가 나팔수를 부양하고 있다. 허운의 이야기를 유언처럼 남긴 나팔수는 죽고, 나는 어떤 고통과 깨달음에 도달한다.

 「줄광대 의 작중 화자인 ‘나’는 이들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부장의 명령으로 내키지 않는 취재 출장을 떠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하며, 그저 적당히 일을 얼버무리려 하는 마음의 자세는 줄을 대하는 허 노인의 엄격성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나’는 그저 타성적으로 자기 일에 큰 의미나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면서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한 전형이다. 허 노인은 바로 그런 ‘나’가 잃어버린 소중한 정신을 보여 주는 인물이며, 그의 아들 허운도 같은 인물이다.

 이들 부자는 줄을 더 탈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미련 없이 죽음을 택한다. 그들을 죽게 한 것은 외부 세력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그들의 엄격성이다. 허운의 ‘승천’은 지상의 영토를 상실하고 삶의 의미를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사람이 가야 할 아름다운 길이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사고사(事故死)가 아니라 ‘승천(昇天)’이다. 작가 이청준은 허운 부자와 남 기자 사이에서 현대인의 참다운 자기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해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