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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손창섭 단편소설 『생활적(生活的)』

by 언덕에서 2023. 12. 18.

 

 

손창섭 단편소설 『생활적(生活的)』

 

 

손창섭(孫昌涉. 1922∼2010)의 단편소설로 1954년 11월 [현대공론]에 발표되었다. 손창섭은 평양 출생의 소설가로서 착실한 필치로 이상 성격의 인간들의 모습을 그려내어 1950년대의 불안한 상황을 형상하는 데 주력했다. 대표작으로는 <비 오는 날>, <잉여 인간>, <낙서록> 등이 있다. 그는 6ㆍ25 전쟁의 충격으로 뒤틀린 한국 현실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불구 상태를 압축하여 인간 본래의 면목을 드러내는 다수의 작품을 썼다.

 손창섭 소설의 형식적 특징은 우선, 결말의 부재로 즉 사태가 끝나지 않고 있다. 종래의 소설에 대한 도전이다. 그리고 모든 등장인물의 명칭이 한자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종래의 표기 방식에 대한 거부이다. 이런 표기 방식은 사건 또는 스토리를 거의 무시하고 인물의 성격만 문제 삼는 그의 소설 세계와 맞물린다. 그것은 존재의 살아있음에 대한 작가로서의 확인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식욕과 성욕은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에 값한다. 작중 인물들의 잠재된 성욕을 통해서 그는 인간 본능의 밑바닥을 훑어본다. 그리고 인간의 위선을 벗겨 내기도 한다. 단편소설 「생활적」의  '그날 밤 동주는 그냥 수컷이었을 뿐이다'와 같은 동물적 표현은 손창섭 소설의 전편에 깔려 있다.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궁핍과 인간성 훼손을 식욕과 성욕이라는 리트머스 시험지를 통해 시험해 보는 듯하다.

 

<6.25때의 부산, 사진 출처: 국민일보>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배경은 한국전쟁 중의 피란도시로 주인공 동주는 아침이 되어도 일어날 수가 없을 정도로 지쳐있다. 몸도 마음도 곤비한 동주는 일본인 여성 춘자의 남편이다. 춘자는 해방 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상태에서 한국전쟁을 맞았는데 우연히 길에서 동주를 만나 동거 중이다. 혼란스러운 시대의 와중에서 경찰, 대학생, 회사원 등 춘자는 세 명의 남자와 동거하다 헤어진 전력이 있다. 옆방에는 사십 살 전후의 건장한 남성 봉수와 그의 딸 순이가 살고 있다. 봉수는 해방 전 만주에서 아편장사를 했고 백 명 이상의 여자를 상대했다고 자랑하는 남자다. 춘자가 아침에 출근하면 옆방에 폐결핵을 앓고 있는 열네 살 순이의 송장 소리 같은, 앓는 소리를 듣는 것과 물을 길어오는 일이 동주의 일과다. 순이는 봉수의 전처 딸로 약을 먹거나 의사에게 진찰받은 일이 없이 하루하루 죽어가는 상황이다. 동주는 앓는 소리가 안 나서 가보니 순이는 알몸으로 자신의 몸을 보고 있다. 몸이 썩어 구더기가 생긴 것이다. 순이의 정신은 살아있지만, 몸은 이미 죽어가고 있다.

 동주는 춘자가 퇴근하기 전에 물을 길어다 놓아야 하는데 우물이라는 곳은 15분 정도 가야 있다. 그길로 통하는 길엔 주민들의 대소변이 있는 개방식 화장실이라 밤엔 물론 낮에도 조그만 부주의하면 똥을 밟는다. 지린내와 구린내가 쉴 사이 없이 발산하고 구더기가 꿈틀거리는 곳을 지나면 우물이 있다. 우물 역시 많은 사람의 생존경쟁을 느끼게 하여 동주는 한참을 밀린 후에야 물을 떠서 들고 오곤 하였다.

 그런데 이 우물에서 오래된 해골 뼈가 나왔다고 (그곳은 고분 지역이다) 주민들이 우물을 피해서 다른 샘터로 옮기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러나 동주는 그곳에서의 경쟁이 싫어서 혼자 그 물을 퍼다 쓴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사람 몇이 동주를 찾는다. 물을 구하기 위해 모두 모여들었던 샘터에 누가 똥을 퍼다 부었고 그들은 동주를 의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 눕는다. 이후 진실이 밝혀져 동주는 혐의를 벗는다.

 한편, 춘자는 옆집 남자 봉수의 의견을 좇아 집을 팔아 우동 가게를 열기로 한다. 산수옥이라는 우동 가게를 개업한 날 순이는 병이 악화되어 죽는다. 동주는 순이의 싸늘한 시체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린다. 동주는 자신이 분명히 살아있고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만이 자기가 확신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장래’라고 생각한다.

 

1952~54년 부산의 피란민들이 물동이를 들고 길게 줄을 서있다.<하버드대 피바디박물관>

 

 손창섭 소설의 형식적 특징에서 문장의 대부분이 '것이다/것이었다'란 특이한 종지형으로 서술된다. 이는 어떤 감정도 가치 판단도 개입되지 않은 철저하게 방관적인 이방인과 같은 태도를 드러낸다. 손창섭은 전쟁이라든가 그로 인한 1950년대 현실의 황폐상 등 객관 현실의 탐구에는 방관자적인 태도를 취하며 지켜볼 뿐이다.

 작중 주인공 동주는 해방 후 여러 해 동안 독신으로 살다 한국전쟁 중 포로수용소에 있다 나온 후 패전국의 국민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길을 배회하는 춘자를 만나 동거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그날 밤 동주는 그냥 수컷이었을 뿐이다'와 같은 동물적 표현이 등장하는 배경이다.

 손창섭의 소설에 등장하는 3∼4인의 등장인물 중 한 명은 어김없이 육체적ㆍ정신적 불구자이며, 다른 인물들은 현실에 적응 못하는 정신적 불구자들이다. 모두가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삶의 중압감에 짓눌려 "그냥 견딜 수 없이 뻐근한 상태일 뿐"이다. 즉, '살아 있음'을 다만 포기하지 않을 뿐, 살려는 의욕을 완전히 잃은 인물들의 세계는 "먹고, 배설하고, 자는 일 외에는 고작 잡담만이 공식처럼 날마다 되풀이되는" 감방의 그것과 같다. 그들은 인간동물원에 수용된 짐승들과 비슷한 존재들이다.

 

 

 손창섭의 소설은 전후(戰後) 의식을 새로운 소설 기법으로 수용했다. 그는 전쟁의 상흔을 숙명적으로 안고 살아가는 처참한 인간상을 부각하고 있다. 이러한 왜곡된 인간의 출현은 인간 자체의 정신적 결함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전쟁과 전후 현실의 어두운 상황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전후세대를 이어 등장한 60년대 작가들은 손창섭을 향해 인간의 모든 문제를 인간 밖의 역사나 사회로 돌리고 자신들의 고통을 과장한다고 비판하게 된다.

 손창섭의 소설마다 방이 나오지만, 그것은 생활과 휴식의 공간이 아니라 그들의 끝없이 침전하는 무기력을 수용하는 밀폐된 동굴과 같다는 느낌을 준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다. 또 그들에게는 살아야 할 뚜렷한 이유도 없듯 죽어야 할 이유도 없다. 충격적인 인간형이다. 종래의 소설은 인간을 짐승과는 다른 가치 있는 존재, 이상적인 존재로 보고 그 바탕 위에서 고민하고 싸우는 인간을 탐구하려 했다. 손창섭은 이에 정면으로 맞서, 이를 뒤엎고 전혀 새로운 인간형을 창출해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