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준 단편소설 『마부와 교수』
이태준(李泰俊, 1904~ )의 단편소설로 1933년 [학등(學燈)]지에 처음 발표되었으며, 그의 작품집 <달밤>에 수록되어 있다.
이태준은 1930년대 소설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그것은 그의 작품이 다양한 장르에 걸쳐 있고, 영적으로도 많을 뿐 아니라, 치밀한 세부 묘사와 미학적 구성을 통한 소설의 완성미가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태준은 1930년대 전후에 아동잡지 [어린이]에 발표한 많은 동화들은 여전히 많은 어린이들에게 웃음과 감동을 주고 있다. 해방 후에는 문학가동맹, 남조선민전등 조직에 참여하다가 1946년 월북하였다. 이후 이태준은 ‘구인회’ 활동 과거와 사상성을 이유로 임화, 김남천과 함께 가혹한 비판을 받고 숙청되어 함흥노동신문사 교정원, 콘크리트 블록 공장의 파고철 수집 노동자로 전락하였다.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960년대 초 산간 협동농장에서 병사하였다는 설이 있다.
단편소설로서도 짧은 작품인 「마부와 교수」는 이태준이 실험 정신을 가지고 시도했던 다양한 장르 형태 중 콩트에 속하는 작품으로, 명쾌한 교훈적 의미를 시사해 주고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여학교 앞에서 자갈을 실은 두 마차가 경사진 길을 올라가다가 앞의 말이 쿵 하고 나동그라졌다. 마부는 땀 배인 동허리에서 그 말가죽이 알른알른 닳은 물푸레 채찍을 뽑아 드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매질을 하여도 넘어진 동물은 입에 거품만 뿜을 뿐, 일어서기는커녕 가루 박힌 눈알이 주인을 바로 쳐다보지도 못한다. 나중에는 명에를 부려놓고 족치어 보나, 매가 떨어질 때마다 네 굽만 움죽움죽하여 조일 뿐이었다.
마부는 화가 밀짚 벙거지에까지 올라 그것을 벗어 내팽개치더니 길 아래 남의 밭에 가서 울짱을 하나 뽑아 들고 달려들었다. 그때 하학을 시작하는 여학생들이 이 일을 보게 되었다. 선량한 그들의 가슴은 돌발적으로 의분에 불탔다.
마침 교수 한 분이 나오다가 길도 막혔거니와 이내 어여쁘고 선량한 제자들의 청을 받기에 이르렀다. 교수는 매질하는 마부 앞으로 성큼 나섰다. 교수는 말을 때리지 말라고, 말의 주인보다 더 가까운 말의 친구처럼 꽤 높은 소리로 탄원했다. 학생들은 손뼉이라도 칠 듯이 속이 시원하였다.
그러나 마부는 대꾸도 없이 다시 매를 들었고, 교수도 말을 다스리는 마부를 말리기보다 제자들 앞에서 잃어버린 체면을 도로 찾기 위해 그냥 있을 수가 없는 듯, 다시 한 걸음 나서며 마부를 나무랐다. 그러자 마부는 의외로 교수의 노염은 탓하지 않고 오히려 목소리를 낮추어 어린애에게 타이르듯, 말이란 것은 쓰러졌을 때 이내 일으켜 세우지 못하면 죽고 마는 짐승이라고 말했다.
이태준은 소외된 인물들의 현실적 고난과 그 인물의 내면세계의 순수무구함을 드러내어 인간애의 의식을 촉구하는 주옥같은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어설픈 인정으로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이태준의 신념이 갈린 작품으로, 밑바닥 계층 사람들의 경험을 통하여 소위 배웠다는 사람들의 허위의식을 꼬집고 있다. 마부는 매우 현실적인 인물이며 교수는 현실의 실상을 잘 알지 못하는 단순한 인정주의자에 불과하다.
광복 이전 이태준의 작품은 대체로 시대적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경향을 띄기보다는 구인회의 성격에 맞는 현실에 초연한 예술지상적 색채를 농후하게 나타내었다. 인간 세정의 섬세한 묘사나 동정적 시선으로 대상과 사건을 바라보는 자세 때문에 단편소설의 서정성을 높여 예술적 완성도와 깊이를 세워 나갔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대표적 단편소설 작가로 평가받을 수 있었다. 광복 이후에 그는 조선문학가동맹의 핵심 성원으로 활동하면서 작품에도 사회주의적 색채를 담으려고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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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북 후 이태준이 종군기자로 전선에 참여하면서 쓴 <고향길>(1950)이나 <첫 전투>(1949) 등은 생생한 이데올로기 장면을 여과 없이 드러냄으로써 일제하의 작품에 비해 예술적 완성도가 훨씬 떨어지고 있다. 그런데 그가 월북한 것도 자의적인 것이 아닌 강제된 것이라는 후문을 남기고 있고, 결국 한국전쟁 이후 숙청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그가 철저한 사회주의적 작가가 아니었으며 그의 열정은 오히려 순수성으로 해서 오해를 받는 인간적 서정성에 기초하였음을 잘 보여준다.
북한체제에 부응하는 작품을 열심히 쓰면서 새로운 국가건설에 매진하던 이태준은 박헌영의 남로당계 숙청작업의 와중에서 살아남지만 소련파의 몰락으로 인해 위험에 처하게 된다. 1955년 과거 구인회 활동의 반동성과 사상성의 불철저를 이유로 가혹한 비판을 받았다. 결국 '부르주아 반당작가'라는 꼬리표를 달고 축출되어 공장노동자로 전락했다.
1957년 함흥 노동신문사 교정원으로, 1958년 함흥 콘크리트 블록 공장의 파고철 수집 노동자로 일하다 1964년에 이르러서야 중앙당 문화부 창작 제1실 전속작가로 복귀한다. 1969년 강원도 장동 탄광노동자 지구에서 사회보장으로 부부가 살고 있는 모습이 목격되었으나 그 이후 소식은 알 수 없다. 1950년대의 북조선은 정치가 예술을 압살해 버리는 비극적인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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