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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이청준 중편소설 『소문의 벽(壁)』

by 언덕에서 2023. 12. 13.

 

이청준 중편소설 『소문의 벽(壁)』

 

 

이청준(李淸俊. 1939∼2008)의 중편소설로 1971년 [문학과 지성]에 발표되었다. 주인공 '박준'은 소설가인데, 그는 억압된 상황과 작가의 사명 의식 사이에서 절망하고 일체의 진술을 거부하는 병리 현상을 겪는다. 서술자 '나'의 추적 결과, 한국 전쟁 당시의 '전짓불의 충격'이 박준의 공포증의 원인임이 밝혀진다. 결국, 진실이 거부되고 거짓된 언어가 판치는 시대 상황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이청준의 작품 경향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 인간의 심리적 내면적 고통을 형상화하는 데 탁월하며, 주로 지적 방법으로 현실 세계의 부조리, 불합리를 정밀하게 해부하며, 인간 존재의 본질적 조건과 진실에 대해 성찰하는 경향을 보인다. 전체적으로 볼 때 사물의 겉모습을 표현하기보다는 그 이면에 가리어진 진실을 탐색하는 경향이 있으며, 주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과 그 속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고통을 묘사하고, 지적 방법으로 현실 세계의 부조리, 불합리 정밀하게 해부, 인간 존재의 본질적 조건과 진실에 대해 성찰하는 경향을 보인다. 정신분열증이 되어가는 한 작가의 잠재의식을 추적함으로써 진실과 억압의 갈등을 첨예하게 보여주는 이 작품은 1972년 [민음사]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소설가 이청준 ( 李淸俊 .1939-2008)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잡지사 편집장인 '나'는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던 도중, 누구에게 쫓기고 있다며 도와 달라는 한 사내를 만난다. 엉겁결에 그를 하숙방으로 데려와 함께 잠이 들었던 '나'는 아침에 깨어나서 사내가 사라져 버린 것을 발견한다.

 이상한 생각이 든 '나'는 집 가까운 곳에 있는 정신병원을 찾아갔다가 그 사내가 병원에서 도망친 환자 '박준'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란다. 담당의사인 김 박사는 '박준'이 심한 히스테리의 일종인 진술공포증에 걸려 있다고 말한다. 환자는 무엇인가로부터 끊임없이 위협당하고 있다는 공포를 느끼고 일체의 진술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박준'의 본명은 '박준일'로서 1-2년 전만 해도 정력적으로 작품을 발표하던 소설가이다. '나'는 '박준'이 쓴 '괴상한 버릇', '벌거벗은 사장님' 그리고 제목이 붙어 있지 않은 중편 소설 등을 읽게 된다. 그 소설 중에 '박준'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전짓불의 실체가 드러난다. 남해안의 조그만 포구가 고향인 '박준'은 6․25가 일어났던 해 가을, 밤중에 밀어닥쳐 전짓불을 들이대고 좌익이냐, 우익이냐를 묻는 정체 모를 사내들에게 공포감을 느꼈던 것이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나'는 김 박사에게 찾아가서 '박준'의 병인(病因)을 이야기하지만, 김 박사는 자신의 권위 의식 때문에 '박준'의 진술을 끌어내기 위한 자신만의 방법을 포기하지 않는다. 끝내 김 박사는 '박준'의 병실 불을 끄고 전짓불을 들이대는 치료 방법을 택하고 만다. 그날 밤 '박준'은 병실을 도망쳐 나가 버린다. '나'는 '박준'이 다시 내 앞에 나타날 것인가를 회의하면서 길을 걷다가 김 박사와 내가 박준의 병세를 더 악화시켰다는 생각으로 괴로워한다.

 

1972년판 [소문의 벽]

 

 이 작품은 일견 전쟁의 상흔으로 인하여 부서져가는 인간의 잠재의식을 나타내려고 한 듯 보인다. 그러나 전짓불 앞에서 답변을 강요당하는 주인공의 의식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진실을 말해야 하는 작가의 인식이며 타협을 용납하지 않는 소명의식이다. 이 작품은 진실된 이상을 추구해 나가는 예술가와 왜곡된 현실의 억압상황에서 나타나는 갈등문제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 것인가를 진지한 어조로 독자들에게 묻고 있으며 독자 스스로 그 대답을 성찰하도록 만들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물음의 가치가 마멸되지 않는 한 이 작품의 진지성은 보편적인 가치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은 주제라고 할 수 있는 현실과 이상, 예술과 생활의 양극성이 첨예하게 노출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박준이라는 젊은 작가가 막상 써야 할 소설은 쓰지 못하고 광인의 행각에 떨어지게 되는 현실 상황과 그 정신의 아픈 궤적이 다루어지고 있다. 항상 진실을 묘사하여야 할 작가가, 외부의 압력 때문에 그것이 좌절될 때 그는 미치지 않고서 존재하지 못한다. 이 소설에서 외부의 압력은 주인공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정체 모를 전짓불을 통해 보편화되고 있다. 6ㆍ25 전쟁 때 경찰과 공비가 번갈아가며 장악했던 한 마을이 있었다. 그 마을의 어린이에게 ‘어느 편이냐’를 요구했던 공포의 전짓불, 작가는 그 앞에서 언어를 상실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 그리하여 예술, 이상으로의 길을 방해하는 모든 상황의 압력은 언제나 전짓불의 공포를 동반하고 그를 괴롭힌다.

 

 

 벽(壁)을 본 순간 무엇을 느끼는가? '답답함'과 '격리'라는 단어가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그 벽이 실체의 벽이 아닌 무형의 '소문의 벽'일 때 더욱더 두려운 존재로 다가올 것이다. 유형의 벽은 쉽게 부숴 버릴 수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벽은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 편견과 억압으로 가득 찬 '소문의 벽'이 숨통을 죄어 오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소설가 '박준'이 경험한 전짓불과 그의 세 편의 소설을 통해서, 진실의 숨통을 조이는, 보이지 않는 벽의 공포를 고발하고 있다.

 잡지 편집 행위에 대한 회의에 빠진 작중 화자인 '나'는 자기의 문제에 대한 원인 규명에 힘쓴다. 그때 소설가 '박준'의 고통의 해명에 개입하게 된다. 여기서 '박준'의 세 편의 소설은 각기 주제를 받쳐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첫 번째 소설은 가사(假死) 상태의 주인공 이야기인데, 이는 자기에 대한 의미를 상실한 주인공의 허탈한 상태를 이야기하고 있다. 두 번째 소설은 벌거벗은 사장님의 이야기로서, 어떤 진실을 알고도 주위의 간섭이나 이목 때문에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더욱 큰 비극을 맞게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세 번째 소설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자, 즉 심문관이 등장한다. 그 자의 정체는 시대적 통념, 정치적 억압, 문학의 허위성이라 할 수 있는데, 바로 그가 심문관인 동시에 '소문의 벽'이다.

 작가는 '박준'이란 인물과 그의 소설을 통하여 글 쓰는 작업에 대한 작가 자신의 회의를 객관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박준'을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인 김 박사를 통하여 고통의 근원을 파악하지 못하는 권위주의적인 존재들을 비판한다. 이 작품은 ‘정말로 미친 증세가 아니라, 미쳐 보이고 싶은 증세’를 보이는 젊은 작가 ‘박준’의 자품과 향적을 더듬어서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개인의 정신의 궤적과 비밀’을 이해하고, ‘무의미한 혼란만 끝없이 계속되어 오던 잡지 일에 대해서도 모종의 대답’을 구해 보려는 의도를 지닌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