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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손창섭 단편소설 『유실몽(流失夢)』

by 언덕에서 2024. 1. 1.

 

 

손창섭 단편소설 『유실몽(流失夢)』

 

 

 

손창섭(孫昌涉. 1922∼2010)의 단편소설로 1956년 3월 [사상계]에 발표되었다. 손창섭은 김성한ㆍ장용학 등과 더불어 1950년대 문학사를 빛낸 작가다. 천성이 비사교적이고 외곬이어서 문단의 기인으로 알려졌으며, 착실하고도 사실적 필치로 이상인격의 인간형을 그려내어 1950년대의 불안한 상황을 작품에 잘 드러냈다. 독특한 시니시즘의 필치, 불의에 참지 못하는 다혈질의 성격 창조, 거침없이 파국으로 몰고 가는 주제의 결말은, 종래의 상식적인 문학관을 크게 뒤바꾸어 놓았다.

 ‘꿈을 잃는다’라는 뜻의 단편소설 「유실몽」은 1950년대 전후문학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며 손창섭의 단편 가운데 가장 완벽한 구도와 주제를 갖춘 원숙한 표현과 문장 기법의 작품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전쟁 자체보다는 전후 사회상황 속의 인물들을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탐구한다. 손창섭의 인물묘사는 자질구레한 면이 없고, 단지 인물들의 언동과 추태 등 행위만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설정하는 인물 유형은 존재론적 시각에서 포착되어 있으며 동물적인 행위의 결과를 수반하고 있다.

 

소설가 손창섭 ( 孫昌涉 . 1922-2010)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배경은 1950년대 중반의 서울. 작중 주인공은 ‘나’ 철수이다. 나는 해방 전 일본에서 대학에 다니다 중퇴했는데 누이가 술집 작부로 벌어오는 돈으로 매형 상근과 함께 한집에서 기생하고 있다. 매형 상근은 누이를 매일 구타하는 데 상당히 숙달된 솜씨를 보여주며, 이에 누이는 기술적으로 맞기만 한다. 누이에게 매형은 네 번째 결혼한 남자다. 누이는 맞을 때마다 매형의 주먹을 견디지 못하여 이내 항복하고 매형은 돈을 얼마간 손에 빼앗으면 부리나케 집을 나가 버린다. 매형은 무직자이고, 누이는 눈부신 미인으로 저녁마다 술집에 나간다. 매형은 사업을 구상한다며 건달들과 어울려 누이가 번 돈을 축내고, 나는 종일 어린 조카딸을 돌보며 소일한다. 

 신경통을 앓고 있는 옆방 강 노인의 딸 춘자를 나는 마음에 두고 있지만, 주변의 모든 환경이 나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게 만든다. 옆방에 사는 강 노인은 으레 딸만 낳고 죽은 마누라에 대한 푸념이나 자기 신세타령을 늘어놓으면서 사위가 되어달라 하지만 나는 장인과 처제를 거느릴 자신이 도저히 없다. 교원이 되려는 꿈을 가진, 야위고 하얀 얼굴의 춘자는 낮에는 제본소에서 일하고 밤에는 초등학교 교원 자격 검정고시 공부하는 처녀가장이다. 나는 누이가 출근한 저녁에 어린 조카를 업은 채 춘자가 일하는 제본소를 하릴없이 찾은 적이 있다.  춘자는 나에게 조카가 먹을 과자값을 주었다. 강 노인은 매일 허리가 아프다며 나에게 몸을 주물러 달라고 요구한다. 누이가 내 결혼 상대로 춘자를 꼽고 있는 점,  나를 사위 삼고 싶어 하는 강 노인의 소원을 춘자에게 말하자 잠시 뒤, 집 뒤편에서 여인의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땅속으로 길을 찾아 흐르는 물줄기처럼 가느다란 울음소리는 어둠 속을 새어왔다.

  춘자는 저녁마다 영어나 수학책을 들고 내가 기거하는 방으로 건너와서 단정하게 무릎을 모으고 앉아 가늘고 흰 손가락으로 모르는 데를 가리킨다. 춘자의 가는 허리와 무릎과 엉덩이가 가까운 곳에 있어서 그때마다 나는 욕망을 누르기 위해 피로를 느낀다. 어느 날 밤, 나는 춘자의 가느다란 몸을 힘껏 끌어안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나는 춘자를 껴안은 채 자꾸만 울었다. 다음 날 저녁, 강 노인이 요통으로 허리를 주물러 달라고 할 때 철수는 옆에 있는 춘자에게 실언하고야 만다.

 “며칠 전에 나는 꿈을 꾸었습니다. 춘자 씨를 끌어안고 우는 꿈을 말입니다. 아주 우스운 꿈이지요.”

 “... ...”

 얼마 후 집 뒤란에서 여자 우는 울음소리가 또 들렸다. 땅속으로 스며 흐르는 물줄기처럼 가느다란 울음소리는 어둠 속을 새어 나왔다.

 매형의 대책 없는 폭행을 견디지 못한 누이는 결국 집을 나가고 만다. 나는 또다시 조카 재순을 업고 제본소를 찾아가 춘자에게 누이가 가출했다고 말한다. 며칠 후 나는 매형 몰래 서울역에서 누이를 만나 조카를 건넨다. 부산으로 떠나는 누이는 조카 재순의 친부라는 남자를 소개한다. 그들은 부산으로 간다고 하며 그곳에 내 일자리도 마련해두었다고 말한다.

 누이에게서 만환 뭉치를 받은 나는 지금이 떠나야 할 때라는 사실을 인식하지만, 누이와 같은 방향이 아닌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며 서울역 대합실을 나선다. 어두운 골목길을 들어설 때 불현듯 창백한 춘자의 얼굴이 눈앞에 얼씬거린다. 뒤이어 여자의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1956년 3월호 사상계, 아래에 이효석의 산정, 손창섭의 유실몽, 전광용의 혈두루 등이 쓰인 목차가 보인다

 

 단편소설 『유실몽』의 주인공이 판잣집 공간에서 상념에 잠기면서 방 안을 둘러보지만,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먹고 남은 저녁 그릇의 지저분한 모양뿐이다. 어찌 그뿐이랴. 모든 작중인물이 그의 절망을 공유하고 있다. 사회에서 버림받고 사랑에 주렸으며, 인간의 연대 감정에 무연(無緣)한 그들은 인생의 뜻을 살아가는 보람을 찾지 못하고 참혹한 몰골로 허우적거리고 있다. ‘소외’란 말은 그들의 존재 방식을 규정하기엔 너무나 호사스러운 어휘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말처럼 그들의 불행과 비참을 환하게 밝혀주는 말은 없다. 손창섭의 작품은 우리 문학에서 가장 강렬한 소외 현상학의 표현이다.

 그들의 어울려 살기란 모두 정상적인 얽힘이 아니다. 서로 얽힐 수 없는 관계이지만, 전쟁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는 논리가 손창섭의 시각이다. 손창섭은 처음부터 가능한 인간의 관계들을 주목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가능한 관계들이 서로 어떻게 얽혀 지내는가를 그는 주목한다. 『유실몽(流失夢)』의 상근 부부와 주인공 철수도 어울릴 수 없는 관계들의 어울림으로써, 전후 피난 생활에 대한 풍속도를 이룬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인간의 꿈이라는 것도 한낱 덧없는 치몽(稚夢)이며, 돌이켜 보면, 유실몽(遺失夢)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피력하고 있다. 또한, 인간 자체를 모멸 차게 냉대하고 있다. 그러나 모멸과 냉대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애정과 연민의 정을 지닌 것이 손창섭 특유의 수법임을 알 수 있다.

 

 

 손창섭의 소설은 전후 의식을 새로운 소설 기법으로 수용하고 있다. 작가는 전쟁의 상흔을 숙명적으로 안고 살아가는 처참한 인간상을 부각하고 있다. 이러한 왜곡된 인간의 출현은 인간 자체의 정신적 결함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전쟁과 전후 현실의 어두운 상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바로 이러한 점, 다시 말하면 인간의 모든 문제를 인간 밖의 역사나 사회로 돌리고 자신들의 고통을 과장한다는 비판을, 전후세대를 이어 등장한 60년대 작가들에게서 듣게 된다.

 손창섭은 1949년 단편 <얄궂은 비>를 「연합신문」에 발표하면서 정식작가로 데뷔했다. 이후 잡지 [문예]에 <공휴일>(1952), <사연기>(1953) 등을 발표하면서 활발한 창작활동을 했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비오는 날> <잉여인간>은 모두 1950년대에 창작된 소설로 이 작품에는 단신으로 월남하여 겪은 전쟁과 난민 체험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혈서>(1955), <미해결의 장>(1955), <인간동물원초>(1955), 「유실몽」(1956) 등의 작품에서도 어둡고 암울한 현실의 밑바닥을 파헤치는 허무주의적 색채가 짙게 깔려 있다. 이 작품들은 손창섭 작품의 특징인 무기력하고 병적인 인물을 등장인물로 배치하여 6.25라는 극한상황이 만든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이후 그는 1960년부터 1984년 일본에 귀화하기 전까지 지속해서 작품을 창작했다. 그러나 그 작품들은 평단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그것은 손창섭의 소설 세계가 1950년대의 상황 속에 갇혀있어, 새로운 시대 변화를 수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1960년대에 김승옥을 비롯한 새로운 문학 세대가 등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