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창섭 단편소설 『낙서족(落書族)』
손창섭(孫昌涉. 1922∼2010)의 단편소설로 1959년 [사상계]에 발표되었다. 일제치하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독립투사의 아들이라는 부채 의식을 걸머진 한 젊은이의 방황과 시련 그리고 그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과의 대립을 그리고 있다.
손창섭은 평양 출생의 소설가로 월남 후 착실한 필치로 이상 성격의 인간들의 모습을 그려내어 1950년대의 불안한 상황을 형상하는 데 주력했다. 대표작으로는 <비 오는 날>, <잉여 인간>, <낙서족> 등이 있다. 6ㆍ25 전쟁의 충격으로 뒤틀린 한국 현실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불구 상태를 압축하여 인간 본래의 면목을 드러내는 다수의 작품을 썼다.
이 작품에서 애국 투사의 아들이라는 주인공 박도현은 일경을 조롱하겠다는 영웅심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내놓으며 은행 협박 사건을 일으켰다가 감옥살이를 한다. 그리고 항상 ‘독립’이니, ‘조국’이니 하는 말을 즐겨 쓰다가 일경과 충돌한다. 또, 형사 앞에서는 비굴해졌다가 그들이 가 버리면, 일경 대신 전봇대를 들이받는 만용을 발휘한다. 옆방에 친구가 있는 데도 소리를 내고 성교하는 영웅심, 짝사랑하는 ‘상희’ 대신 ‘노리꼬’ 같은 약자를 겁탈해 버리는 만용, 형사가 가 버린 뒤에 오줌을 누며 ‘호스를 조종하여 개 같은 놈이라고 쓰는 것’ 등의 행동을 보이는데 이는 모두 괴팍한 행동으로 주인공의 방황에 속한다.
손창섭의 작품은 주로 해방 후의 혼란과 6ㆍ25라는 민족사의 비극 속에서 불구적인 육체와 비정상적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을 등장시켜 인간에 대한 부정과 야유의 시선을 던지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에는 인간의 따스한 애정에 대한 향수가 깃들어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시대적 배경은 일제강점기의 조선이다. 독립투사를 아버지로 둔 박도현은, 고향인 평양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내놓으라며 은행 협박 소동을 벌이고 월만(越滿)하려 하였으나, 거듭 실패하여 경찰의 감시가 심해진다. 게다가 독립운동을 하는 아버지의 거처를 알기 위한 일경(日警)의 추궁에 못 이겨, 일본으로 밀항한다.
일본에서 그는 하숙 친구인 한상혁을 통해 그의 누이동생인 상희를 만나게 된다. 상희에게 있어 박도현은 존경의 인물, 사모의 대상이 되고, 후에는 여러 모로 도현을 도와주게 된다.
한편, 박도현은 일본에 와서도 역시 일본 경찰의 집요한 추적을 받고 여러 차례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다.
어느 날, 박도현은 학교에서 조선인 학생의 부당한 퇴학 사건에 분개하여 조선인 학생의 등교 거부 등을 주도하여 이를 실현시키려다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만다. 경찰을 피해 이리저리 하숙을 옮겨 다니던 도현은, 노리꼬를 강간하고 임신을 시킨다. 또, 하숙집 주인 여자가 도현의 행동을 경찰에 밀고한다는 얘기를 듣고, 그 여자 역시 겁탈로써 복수한다. 이런 일로 경찰에 다시 연루되나, 도현은 이에 죄의식을 가지지 않고, 오히려 일본에 대한 복수라며 변명한다.
그 후, 아버지가 조선에 두 명의 독립군과 함께 내려왔다가 결국 사살되었다는 사실을 고향의 동기로부터 듣게 된다. 이에 그는 더욱 분개하여 다이너마이트를 만들어 일황(日皇)을 죽이고 경찰서를 폭파하려 한다. 그러나 상희의 만류로 그의 추종자인 병오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하며, 훗날을 기약하기 위해 일본을 떠난다.
손창섭의 소설은 전후(戰後) 사회의 굶주리고 헐벗은 인간 소외의 문제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러한 소외된 인간의 삶에 대한 작가적 관심은 전후 사회의 물질적 궁핍과 황량한 사회 현실에 대한 문학적 대응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도 주인공 박도현이라는 과격주의적 인물을 통해 자아의 통일과 자율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열등감, 부채 의식에 시달리며, 자기의 열등의식을 보상받기 위하여 행동하는 돈키호테적 인생 역정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자기 존대와 억측, 허세를 부리는 인물과 대조되는 상희는 이지적이며 객관적인 삶의 판단력을 지니고 있다. 그녀는 현실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판단할 뿐 아니라, 과격한 테러리즘은 결국 자기 파멸과 희생의 결과만 낳을 뿐이라는 이지적 판단을 지닌다. 따라서, 이 작품은 박도현이라는 과격적 인물을 통하여 식민지 사회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삶의 부동성(浮動性)을 드러내는, 역설적 의미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
손창섭이 이 작품에서 그리고 있는 것은, 표면적인 삶에서는 정치적인 이유로 소외되었지만, 내면적인 삶에서는 민족의 독립을 바라는 많은 지식인들에게 지지를 받는 한 과격주의자이다. 그 과격주의자의 삶을 이루고 있는 기본 구조는 억압받고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때 그의 과격한 행위가 시작된다.
그 인물과 대조되는 위치에 서 있는 상희라는 여주인공은 손창섭의 인물 중에서 가장 긍정적이고, 이지적인 인물이다. <소년>의 ‘남영’, <잉여 인간>의 ‘인숙’에서도 그 편린이 보이기는 하지만, 상희처럼 작가의 당당한 비호를 받고 있는 인물은 손창섭의 작품 속에서 드물다. 그녀는 도현과 반대로 냉정하게 현실을 관찰하고 분석하여, 거기에서 어떤 결론을 유출해 내는 인물이다. 식민지 치하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식인이 할 일은 그녀에 의하면, 두 가지 방법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외국으로 망명하는 길이며, 또 하나는, 민족을 소극적으로나마 도울 수 있는 의사나 변호사가 되는 길이다. 과격한 테러리즘은 공연한 자기희생에 지나지 않는다.
해방된 지 14년 후인 1959년에 발표된 「낙서족」에 피력된 그와 같은 식민지 치하의 투쟁 방법은 그가 그 자신의 과격주의를 비판하고 있다는 한 증거이기도 하다. ‘자기가 그려놓은 모멸의 인간상에게서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을 느끼는’ 인간에의 복귀 현상은 ‘상희’라는 인물에게서만이 아니라, ‘도현’에게서도 보인다. 운명에 대한 자포자기적 태도가 지워지고, 자기의 행동은 자기 스스로 책임진다는 본연의 모습을 닦아내고 있다.
도현은 독립운동가의 아들이라는 자부심 때문에 돈키호테적인 희극을 연출하고 있지만, 결코 그 이전의 작품에 보이지 않던 자기 행동에 대한 반성을 진심으로 재촉하고 있다. 「낙서족」은 <잉여 인간>과 함께 ‘무의미한 것을 무의미하게 보려는 초기의 절망적인 신음’에서 서서히 일어난다. ‘무의미함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의미 부여의 작업장’에 나선 그의 변모의 과도기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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