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천보전투(普天堡戰鬪)
김일성의 항일유격대가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천보(현재 북한의 행정구역상 양강도 보천군 보천읍)를 습격하여 승리했다는 전투로 만주사변 이후 활동이 주춤했던 독립군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알린 동시에 ‘김일성’이란 이름을 전국에 알린 계기가 된 항일무장투쟁이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이 전투는 1937년 3월 서강회의에서 조선인민혁명군(동북항일연군)이 국내진공작전을 펴기로 결정함에 따라 김일성(金日成) 지휘하에 수행된 것으로 작전은 최현(崔賢)의 인솔하에 한 부대를 무산 방향으로 진출시키고, 또 다른 한 부대를 국경지대인 임강·장백으로 진출시켜 일본군 군사력을 분산시키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37년 5월 하순 김일성이 주력부대를 편성, 보천보 일대를 정찰하고 공격준비를 마쳤을 때, 무산지역에 진출한 부대가 적의 공격으로 포위될 상황이 되자 당초 예정된 작전 개시일을 앞당겨 보천보에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공격은 1937년 6월 4일 밤 10시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 150명이 2개의 습격조와 2개의 차단조, 1개의 정치공작조로 나뉘어 제1습격조는 일제 경찰관 주재소·면사무소·소방서를 공격하고, 제2습격조는 우편국·농사시험장·산림보호구를 습격하여 기관 건물들을 전소시키고 일제군경을 전멸시켰다.
한편, 공격이 계속되는 동안 정치공작조는 김일성 작성의 조국광복회 10대 강령과 포고문, 그 밖의 격문들을 뿌리면서 정치선전을 전개하였다. 포고문의 내용은 ‘조선인민들은 조선인민혁명군에 호응하여 일제 통치를 분쇄하고 조선인민의 정부를 수립할 것’을 호소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이로써 국내 진공의 목적을 달성하고 철수를 하였는데, 철수 시 많은 주민들이 이들을 도와서 노획물자 운반에 동참하고 가담을 하였다. 이들은 돌아가던 중 일본군과 교전을 벌여 일경 7명이 사망했다. 북한에서는 이 전투를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중 가장 큰 성과라고 말한다.
사실 이 전투는 규모나 전과를 특기할 것이 없어 차라리 ‘소동’이라 할 정도다. 그러나 유격대의 국내 침입이란 사실 자체가, 대중과 독립운동 진영의 패배주의를 단숨에 털어버렸기에 심리적 효과는 컸다. 여기에 [동아일보]가 비록 ‘비적(匪賊)’이라 표현했지만 호외를 발행하며 속보를 전해 ‘김일성 신화’를 낳는 데 일조했다. 북한에서는 이 전투를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중 가장 큰 성과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때의 공격부대가 김일성의 부대가 아니라 또 다른 김일성이라는 사람이 이끈 부대였다는 설, 보천보가 인구 1,300여 명의 작은 마을이고 무장 병력은 주재소 순사 5명뿐이었으며 이들을 상대로 한 물자 보급 투쟁이었다는 주장 등으로 볼 때, 북한에서 역사적인 항일 승리 전투라고 하는 것은 과대평가로 판단된다.
일제가 전쟁준비에 광분하여 조선민중을 가혹하게 착취·탄압하던 시점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비롯한 국내의 각 신문에 크게 보도되어 조선인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켰으며 김일성의 이름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전투 이후 ‘함흥연대 분전기’ 기사에서 보듯 국내에서 작전을 벌이기도 했지만 일제가 대규모 토벌전을 전개하면서 만주 일대의 항일유격대는 대부분 세를 잃었다. 따라서 김일성을 비롯한 항일유격대는 1941년 연해주의 하바롭스크로 도피해 광복 때까지 머물렀다.
한편 북한에선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를 항일투쟁의 상징으로 신성화한 반면 남한에선 2002년까지 교과서에서 이를 다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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