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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민생단 (民生團) 사건

by 언덕에서 2023. 10. 25.

 

민생단 (民生團) 사건

 

북한이 독립군 김일성(가운데 안경 낀 이)이 오도양차밀영에서 경위대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라 주장하는 사진. 하지만 새로 발굴된 중국 유가족들에 의하면 사진 속 인물은 제2군 군참모장 왕작주이며, 앞에 앉은 소년은 안경희(샤오안즈)다. 사진출처 : 서울셀렉션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만주 각지에서는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 등 조선인 독립군 부대와 중국인의 항일 의용군이 각지에서 봉기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며, 두 항일 세력간에 연합전선을 형성하려는 움직임도 구체화되었다. 이에 당시 [매일신보] 부사장으로 있던 박석윤은 일제의 만주침략을 적극 뒷받침하고 한ㆍ중 양 민족을 이간시키며 우리 민족의 항일투쟁을 저지하기 위해 그해 10월경부터 조선총독부 및 간도일본영사관 당국의 후원과 조종을 받고 밀정조직인 [민생단(民生團)]을 조직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그는 먼저 동민회(同民會) 계열의 친일주구배 조병상 및 북간도의 친일파 김동한, 김택현, 이경재, 이인선, 최윤주 등과 협의하여 민생단의조직준비를 시작하였다.

 계속해서 천도교 지도자 이인구 및 전성호 등 친일 민족개량 주의자와 반공주의자들을 규합한 그는 일본군 대좌 출신 박두영(朴斗榮)을 단장으로 하는 [민생단]을 1932년 2월 5일 간도룽진(龍井)에서 마침내 발족시켰다. 이 단체는 겉으로는 만주에서의 조선인 생존권확보(생활안정)와 독특한 문화건설, 자유로운 천지의 개척(낙토의 건설)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한ㆍ중 양 민족을 이간하여 중국공산당 조직 및 산하대중단체를 파괴하고 독립군 등 무장 세력을 탄압하려는 반공, 친일의 간첩(밀정) 조직이었다.

 [민생단]은 우여곡절 끝에 그해 7월에 곧 해체되었지만 이들 주구배들의 특수공작은 어느 정도 성공하여 이른바 박두남(朴斗南) 체포사건을 계기로 조선인 혁명운동가와 중국인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게 되었다. 즉, 이를 고비로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산하의 동만특위(東滿特委) 등 한,중 양 민족연합의 항일무장투쟁 세력 내부에서는 조선인 대원을 거의 일제의 밀정으로 단죄하는 잘못된 숙청작업이 진행되었다. 이리하여 1935년까지 간도지역에서만 200여 명(일설에는 500여 명), 기타 지역까지 합하면 500여명의 조선인 운동가들이 무고하게 민생단원으로 몰려 희생되는 참변이 벌어졌다.

 결국 간도 자치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민생단 사건으로 인해 만주의 한ㆍ중 항일운동 세력은 커다란 타격을 받게 되었고 두 민족간의 연대는 와해될 위기에 빠졌다. 중국공산당 내 민생단 밀정이 전원 조선인이었으므로, 중국인과 조선인은 조선인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고하게 처형된 조선인들의 가족들과 동료들이 조선인들과 중국인들에게 감정이 생기게 된 결과 조선인과 조선인 그리고 조선인과 중국인의 연대가 약화되었다. 중국공산당 계열의 운동세력이 주도한 항일무장투쟁은 물론, 우리 민족의 민족주의 계열 세력이 주도한 독립운동도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민생단 사건을 그린 작품으로는 김연수의 장편소설 「밤은 노래한다」(https://yoont3.tistory.com/11302749)가 있다.


 

박두남 체포사건 :

 1932년까지 중국공산당 동만특위의 반민생단 투쟁은 그 기세가 격렬하지는 않았는데, 이는 항일투쟁을 함께하던 조선인과 중국인 사이의 유대감이 아직은 끈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33년 5월 훈춘유격대 정치위원이었던 박두남(朴斗南)이 조선인 중국공산당원 반경유(潘慶由: 조선명 이기동(李起東)를 사살하고 도주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박두남은 이후 일제에 투항해 유격대 근거지 파괴에 앞장섰다. 이 사건은 만주의 조선인 및 중국인들을 크게 동요하게 했고, 동만특위는 반민생단 투쟁을 더욱 치열하게 진행할 것을 지시했다.


박석윤(朴錫胤.1898∼1950) :

 언론인. 출신지는 전라남도 담양(潭陽). 1919년 일본 교토(京都)의 제삼고등학교, 1922년 3월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일본에 유학할 때 조선인 유학생 단체인 조선유학생학우회 편집부장과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귀국하여 휘문고등보통학교ㆍ중동고등보통학교 교원을 지내다가 1924년 시대일보사에 기자로 들어갔다.

 1925년부터 1927년까지 조선총독부 재외연구원으로 선발되어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연구하였다. 1930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사 부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32년 동만주 일대 항일무장운동세력의 분열을 조장하는 [민생단(民生團)] 결성을 위해 힘썼다. 같은 해에 일본 외무성 촉탁으로 활동하고, 1934년 [시중회(時中會)]를 발기하는 데 참여하였다. 1934년 만주국 외교부 촉탁, 1935년 [만주국협화회] 이사 등을 맡았다.

 1937년 만주국 정부 국무원 외교부 조사처장으로 임용되었고, 1939년 만주국 초대 폴란드 바르샤바총영사로 부임하였다. 1941년 국무원 총무청 참사관 겸 외무국 참사관, 1942년 국무원 총무청 외교부 참사관 등 만주국의 고위 관료로 활동하였다. 관료로 재직하면서 1940년 항일무장세력 귀순공작을 전개한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 총무로 활동하였고, 1942년 만주국협화회 중앙본부 위원 등을 지냈다. 1940년에 만주국 정부로부터 훈4위 경운장(景雲章)을 받았다.

 박석윤이 앞장선 친일 주구단체의 활동은 재만 조선인을 분열시킴으로써 그들의 반일의식을 말살하고 항일무장 투쟁의 존립기반을 없애려는 것이었다. 간교한 박석윤은 1940년대 중반 일제의 패망이 시간문제인 것을 간파하고 서둘러 귀국하여 서울에서 은거하고 있다가 1945년 8월 15일 조선총독부당국이 여운형(呂運亨)에게 행정권을 넘겨줄 뜻을 비쳤을 때 여운형을 대리하여 당국과 절충하기도 하는 놀라운 변신을 보여 주었다. 요컨대 그는 절대 권력자에 아부하는 기회주의자의 화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