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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현대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창백한 언덕 풍경(A Pale View of Hills)』

by 언덕에서 2023. 9. 11.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창백한 언덕 풍경(A Pale View of Hills)』

 

 

 

일본 출신 영국 소설가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 · 石黒一雄, 1954~)의 장편소설로 1982년 발표되었다. 이 작품은 이시구로의 데뷔작으로 그해 [위니프레드 홀트비 기념상]을 수상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일본 나가사키가 배경인 이 소설에서 이시구로는 피어오르는 버섯구름 하나 없이, 폭격의 굉음이나 처절한 비명 하나 없이 원폭 투하의 비극을 그린다. 원폭 후 9년이 지난 1954년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영국으로 이주한 작가는 담담하고 절제된 서술로 인간 내면의 상처에 집중하면서 영어로 쓰였지만, 일본적 정서를 가장 적확하게 담은 소설을 탄생시켰다.

 액자소설 형태를 띤 이 작품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복구가 한창이던 일본 나가사키가 배경으로 영국 런던 교외에 사는 화자가 딸과의 산책길에서 그네에 매달려 있는 소녀를 우연히 목격하면서 그것이 실마리가 되어 그녀를 과거로 이끈다.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을 가로지르는 상처를 차분히 보며 다음에 올 희망을 말하는 이 작품은 조용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전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상흔을 이야기하는 이 작품은 피어오르는 버섯구름, 아비규환, 처절한 비명 등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깔끔하고 절제된, 조용하게 심금을 울리는, ‘문 앞에 철쭉이 피어있는 작은 집’을 연상시킨다.

 

가와사키 평화공원 내의 [평화기념상]. 소설 속에 이 기념상이 등장하는데 며느리 에츠코와 시아버지 오가타는 함께 피크닉 간 이곳에서 전쟁의 상흔을 없애기에는 어색한 조각상이라는 의견을 나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영국에 홀로 사는 중년의 일본 여인 에츠코가 딸의 자살을 겪은 후 과거 일본에 살던 시절 만난 모녀 사치코와 마리코를 회상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중년의 일본 여인 에츠코는 일본에서 살다 일본인 첫 남편과 이혼하고 이후 재혼한 영국인 남편과 사별했다. 영국 시골의 넓은 집에 홀로 사는 에츠코는 일본인인 첫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첫째 딸 게이코의 자살로 상심에 빠져 있다. 영국인 남편과의 두 번째 결혼에서 얻은 딸 니키가 에츠코를 위로하기 위해 집에 와 있는 동안, 에츠코는 오래전 바다 건너 일본에서 게이코를 임신했을 때 만났던 사치코와 마리코 모녀를 떠올린다.

 그 당시 에츠코는 첫아이를 임신한 채 나가사키 시의 강 근처에 자리한 작은 아파트에 살았다. 남편은 대기업의 촉망받는 간부이며 시아버지 오가타 상은 전직 교장으로 지역 사회에 신망이 높은 이였다. 어느 날 마을 구석 하천 근처의 허름한 빈 오두막에 살기 위해 사치코라는 여인이 어린 딸 마리코와 함께 홀연히 흘러들어온다. 고양이를 키우는 모녀는 그곳을 거처 삼아 지내며 주위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 미국 군인과 만나고 있는 사치코는 곧 이 비참한 현실에서 벗어나 미국에 가리라는 아메리칸드림에 부풀어 있고, 전쟁 때 아기를 살해하는 여자를 목격한 마리코는 그 여자가 자신을 데려갈 것이라는 망상에 쫓긴다. 차분하고 순종적인 에츠코에 반해 사치코는 거만하고 이기적이며 자신의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성격이다. 에츠코는 사치코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두 모녀와 미묘한 관계를 이어 간다.

 사치코는 부자 삼촌집에 가서 살 수 있지만 거부하고 주정뱅이 미군 프랑크를 따라 일본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마리코에게 자신의 결정을 통보한다. 이삿짐을 싸던 사치코에게 마리코는 키우던 고양이를 돌봐야 한다며 미국으로 함께 떠나기를 거부한다. 그러자 사치코는 고양이들을 채소 상자에 담아 개울에 넣어 죽인다. 모녀와 함께 자리하던 에츠코는 이 장면을 지켜볼 뿐이다.

 언니 게이코가 자살한 방 앞을 지나기가 싫다며 니키는 에츠코의 지난 기억을 건드리지만 에츠코는 애써 태연해한다. 사치코 모녀에 관한 에츠코의 회상이 끝나자 딸 니키는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자신의 삶에 만족한다며 런던으로 떠난다.

 

일본 출신 영국 소설가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 · 石黒一雄, 1954~)

 

 에츠코의 회상이 가리키는 방향의 끝에는 첫 남편 오가타 지로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게이코와 게이코의 자살이 있다. 고향 가와사키의 기억 속 마리코는 게이코의 분신이다. 전후의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아기를 익사시켜야만 했던 여인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은 마리코는 엄마 사치코가 자신이 아끼던 고양이들을 죽이는 순간을 거부하면서도 끝내는 받아들여야만 한다. 사치코는 자신을 여러 번 배신한 주정뱅이 미군 프랭크에게 의지해 아메리칸드림을 꿈꾼다. 프랭크는 <나비부인>에 등장하는 핀커튼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에츠코는 마리코의 행복을 이유로 사치코의 미국행을 반대하지만, 훗날 게이코가 행복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영국인과 재혼하여 딸을 데리고 일본을 떠났던 건 에츠코 자신이었다. 모성애는 절박한 자아를 이기지 못하고, 마리코가 아끼던 고양이들은 집이 될 뻔했던 채소 상자 안에 갇혀 강물에 떠내려가면서 수장된다. 강가에서 자신을 찾던 에츠코의 신발에 감겨있던 끈을 보고 마리코는 도망친다. 그러나 제대로 도망치지 못하는 이는 자살한 게이코였다. 인과의 연결고리는 다중적이며 아득하고 우주의 에너지는 신비롭게 흘러간다.

 

 

 관습과 전통은 나가사키의 하늘 위를 줄곧 떠돌고 있지만, 변화는 필연적이고 가차 없다. 전남편 지로의 아버지 오가타 상은 일본의 과거 모습처럼 전직 교장으로 품위 있고 성실하지만 편협하고 쇄국적인 사람이다. 과거 부유한 귀족이었으나 자식과 전 재산을 잃고 국숫집을 운영하는 후지와라 부인, 서양의 합리적 사고방식을 받아들였지만, 의식이나 가치관은 완고하기 짝이 없는 전남편 오가타 지로, 서둘러 과거를 비판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기 원하는 마쓰다 시게오 교사 등 작품 속 인물들은 개인의 이미지가 함축하는 것보다 훨씬 큰 상징을 만들어낸다.

 결국, 오가타 상은 은퇴하고, 후지와라 부인은 국수를 말고, 지로는 이혼하여 아내와 딸을 영국으로 떠나보낸다. 이후 게이코는 자살하고, 에츠코는 그 시절을 회상하며, 언니의 환영 때문에 엄마의 시골집에서 잠 못 이루던 딸 니키는 서둘러 런던으로 돌아간다. 이 소설에서는 액자 속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뒤섞이고 연결된다. 동양과 서양의 연결이기도 한 혼혈아 니키에 관해 독자는 단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에 얽혀 있으면서도 아무것에도 묶이고 싶어 하지 않는 그녀야말로 작가가 말하는 모두의 미래라는 사실이다.

 이시구로는 1954년 일본 나가사키시에서 태어나 5살인 1958년, 잉글랜드로 부모와 함께 이주하였다. 1978년 켄트 대학교에서 학사학위를 받았으며, 2년 후인 1980년에는 이스트앵글리아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1983년에는 영국 시민권에 등록되었다. 영어권에서 가장 유명한 소설가 중 한 명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장편 <남아 있는 나날>로 1989년에 [맨부커상]을, 2017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