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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염상섭 장편소설 『이심(二心)』

by 언덕에서 2023. 9. 20.

 

염상섭 장편소설 『이심(二心)』

 

 

염상섭(廉想涉. 1897∼1963)의 장편소설로 1928~1929년 [매일신보]에 연재되었고 1929년 단행본으로 발표되었다. 작가의 작품 중에서도 그리 알려지지 않은 장편소설로 1920년대 우리나라 사회 상황을 날카롭게 포착한 작품으로 재평가되었다.

 이 소설이 발표된 것은 1929년으로 염상섭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삼대>보다 2년 앞서 나왔으나, 구성이나 성격 묘사가 허술하다는 이유로 다른 작품에 비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작품이다. 그러나 문학 평론가 유종호는 논문 <소설과 사회사>를 통해 “이 작품이 소설로서는 실패했지만, 당대 사회의 기본 구조를 포착하는 데 있어서는 크게 나무랄 데 없는 안목을 보여 준다”라고 평가했다. 단순히 자연주의 문학의 작가로 알려졌던 염상섭이 작품 활동을 하던 식민지 시대의 사회상과 연결돼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장편소설 「이심(二心)」은 애정소설이지만, 1920년대의 시대상을 꿰뚫어 묘사했다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권영민은, “<표본실의 청개구리> <삼대> 등으로 고정된 염상섭에 대한 기존의 통념이 너무 강해 그가 가지고 있는 다른 면모가 제대로 다루어지지 못했다"라고 전제하고 "염상섭은 1920년대부터 1963년 죽기까지 40년 이상을 꾸준히 활동한 작가다. 그렇게 긴 활동을 한 작가는 우리 문학사에서 그가 거의 유일하다. 지금까지 1920∼1930년대의 작가로만 평가되어 왔지만, 염상섭은 많은 문학적 변모 과정을 거쳤고 그의 그러한 변모는 곧 우리 신문학사의 단면들을 그대로 담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구한말 군수를 지낸, 행세깨나 하는 집의 막내딸 ‘춘경’은 여학교 정구 선수였다. 정구 코치를 해 주던 남학생 ‘창호’가 춘경의 책에 우연히 낙서를 한 것이 두 사람이 연애한 것으로 오해돼 모두 퇴학당한다.

 집에서 쫓겨난 춘경은 결국 창호와 가까워져 신접살림을 차리지만, 사회주의자로 몰린 창호가 2년간 옥살이를 하는 바람에 일본인이 경영하는 호텔에 취직, 옥 뒷바라지를 한다. 이 일본인으로부터 돈을 빌어 쓴 일이 있으나 그와의 관계는 곧 청산한다. 일단 출옥한 창호가 재차 구류를 사는 사이 춘경이 다시 이 일본인에게 유혹당하자 그러잖아도 의심을 하고 있던 창호는 춘경을 완전히 거부한다.

 일본인은 다시 미국인 청년 ‘커닝햄’에게 춘경을 중매해 준답시고 거액을 받고 중국으로 도망친다. 이후 창호는 창호대로 춘경을 혼내준답시고 그녀를 유곽에 팔아넘긴다. 유곽에 갇혀 있던 춘경은 결국 스무 살의 나이로 자살하고 만다.

 

소설가 염상섭(廉想涉. 1897-1963)

 

 이 작품은 치정(癡情) 소재로 한 신파극처럼 보일지 모르나, 1920년대 시대상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게 유종호의 분석이다. 이를테면, 춘경을 파멸로 몰아넣은 악역이 호텔을 경영하고 있는 일본인이란 사실은 당시 일본 자본주의의 한국 상륙과 그 수탈의 실상을 은유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점이다. 또한 이 작품은 일제 지배 구조의 맨 밑바닥 희생자는 여성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어 결국 여성 해방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춘경이 창호에 대해 온갖 정성을 다 쏟으면서도 일본인에 대해서는 일면 방탕한 ‘마음의 허락’을 한 것은 일제치하에서 굴종하며 살고 있던 많은 지식인들의 생존 방식을 비유한 것이라고 유종호는 지적했다. 이 작품의 미국인 ‘커닝햄’에서 드러나듯 당시 우리 눈에 비친 미국인들은 ‘부자이며 멍청하여’ ‘간사하고 영악한’ 일본인의 이미지와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염상섭 문학의 변모 과정은 5단계로 나뉘어 설명되고 있는데, 그 흐름이 당시 역사적․문학적 상황을 그대로 대변한다. 염상섭은 1920년대에는 장편 시대를 열었고 1930년대 후반에는 이데올로기의 논의가 어려웠던 만큼 통속 소설로 전향, 문학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권영민은, "염상섭은 비대중적 작가로 알려져 왔으나, <사랑과 죄> <불연속선> 「이심」 등은 애정 소설로 (독자에게) 매우 재미있게 읽힐 것"이라고 말했다. 해방 이후 6ㆍ25까지 염상섭은 민족주의파도 좌파도 아닌 중간노선을 고집하는데 이에 대해 김윤식은 "민족주의파가 (강압적이라는 측면에서) 일본 제국주의와 다를 바 없었음을 알고 그 당시 대항 수단이 무정부주의나 허무주의임을 정확히 간파한 작가가 바로 염상섭"이라고 평했다.

 염상섭의 「이심」은 1928년 10월 22일부터 1929년 4월 24일까지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다통속소설로 폄하되었으나 실제 이 작품은 소설사적 의미와 발표연대로 보아  <사랑과 죄>와 <삼대>의 맥을 잇는 염상섭의 주요한 작품 중 하나이다그리고 무엇보다도 구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와 매우 유사한 구성을 지닌 작품이다한 남편과 두 명의 외간 남자와의 자유연애가 불륜이지만 핍진하게 그려진 내용도 퍽 흡사하다.

 당시의 사회 세태를 이렇게 비유하는 외에도 이 작품에는 그동안 60년간의 언어 변화 과정에서 잃어버린 언어들이 많이 나온다고 유종호는 말했다. ‘다리를 쉬어간다’는 뜻의 ‘헐각’, ‘술을 억지로 청하여 마신다’는 뜻의 ‘토주’, ‘사건의 실상을 조사한다’는 뜻의 ‘해설’ 등이 그러한 예이다. ‘단식’ 대신에 ‘절곡’, ‘음모’ 대신에 ‘휼계’ · ‘휼책’ 등의 말을 썼던 점도 특이하다. 오랫동안 묻혀있던 이 작품을 새롭게 검토한 유종호는 “전체적으로 이 작품은 식민지 수탈 구조를 비유적으로 잘 나타낸 ‘유쾌한 실패작’”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