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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현진건 단편소설 『할머니의 죽음』

by 언덕에서 2023. 9. 13.

 

현진건 단편소설 『할머니의 죽음』

 

 

빙허 현진건(玄鎭健, 1900-1943)의 단편소설로 1923년 [백조]지에 발표되었다. 할머니의 임종을 중심으로 여러 가족들의 심리를 포착한 작품으로 작가가 초기의 신변 소설에서 객관적 심리 묘사로 진일보하는 면모를 보인다. 염상섭의 <임종(臨終)>과 상당 부분 유사한 분위기를 지녔다.

 처녀작 <희생화>를 제외하고 모든 작품의 기교가 뛰어나, 김동인은 그를 ‘비상한 기교의 천재’라고 평하기도 했다. 그는 염상섭과 더불어 한국의 근대 사실주의 문학의 개척자이기도 한데, 그의 사실주의는 일반적인 사실주의의 제삼자적인 관찰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응시와 관찰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우리말의 풍부한 활용으로 인한 정확한 적용과 치밀한 구성, 일관된 통일성과 사실성 등이 다른 작가에서는 좀처럼 발견하기 어려운 점이다. 그러나 그가 묘사한 주인공은 대개 끊임없는 좌절에 빠진다. 이는 상황에 대처하는 인간의 무한한 노력으로 볼 수 있으며, 여기에서 비극적인 엄숙미가 수반한다. 그가 빈궁의 극복 수단이나 방향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은 것은, 작가가 선전가나 사상의 전파자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그는 당시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지녔고, 그의 인식을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데 성공한 대표적인 사실주의 작가라 할 수 있다.

  할머니의 죽음은 현진건이 신변 소설에서 객관적인 심리 묘사 소설로 변화하는 계기를 이루는 작품으로, 죽음을 앞둔 할머니와 임종을 준비하고 있는 가족의 행동을 그린 단편이다.

 

빙허 현진건 (玄鎭健, 1900-1943)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3월 그믐날 '나'는 시골 본가로부터 '조모주 병환 위독'이라는 전보를 받고 급히 시골로 내려간다.

 곡성이 들릴 듯한 사립문을 들어서니 할머니의 병세는 이미 악화되어 있었다. 여든을 둘이나 넘은 할머니는 연로한 나이 탓에 작년 봄부터 기운이 쇠잔하여 가끔 가물가물했었다. 멀리 떠나 있는 친척들이 모두 모여 긴장된 며칠을 보내는 가운데 집안 내의 효부로 알려진 중모(仲母)는 할머니 곁에서 연일 밤을 새워 가며 할머니를 간호하고 빨리 기운을 회복하길 빌며 염불을 외운다.

 그런데 이런 행동이 독실한 불교 신자인 할머니에게 인정받지 못하며 '나' 또한 "놀라운 효성을 부리는 게 도무지 우리 야단칠 밑천을 장만하는 게로구나."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런 와중에 할머니는 정신이 흐릿해져 자손들로부터 웃음거리가 된다. 할머니가 겪는 고통과는 달리 빨리 끝장나기를 은근히 바라는 자손들은 직장으로 인해 무작정 눌러 있을 수도 없어 한의원을 불러 진맥을 시킨다. 오늘내일 넘기기 힘들다는 진단과는 달리 하루하루가 무사히 지나자 양의(洋醫)에게 다시 진찰을 시킨다.

 그러나 할머니의 병세는 호전되었고, 몇 주일은 염려 없다는 말에 안심한 자손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모두 떠나고 '나'도 할머니에게 곧 완쾌되실 거라고 위로하며 서울로 올라온다. 그러나 어느 화창한 봄날, 우이동 벚꽃놀이를 막 나가려는 때에 '오전 3시 조모주 별세'라는 전보를 받게 된다.

 

 

 현진건의 초기 작품이 자기 자신에 대한 응시와 관찰에 의한 사소설(私小說) 형식을 밟았는데도 주관성이 배제되고 객관 묘사의 입장이 취해져 있다. 이제까지 빙허를 단순히 기교파 작가로 평가해 왔으나, 실제에 있어서 그는 인식과 기교가 완전히 조화를 이룬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실주의 작가이다. 기법에 있어서는 그의 대상에 대한 인식과 관조를 통해 꿈이나 환상보다는 현실을 직시하는 입장을 취했다. 또 그의 간결ㆍ소박한 문체는 우리의 눈길을 끈다. 그리고 그의 소설은 철두철미하게 빈궁을 재현한 입장을 취한 것으로서, 정확한 관찰과 표현을 조화시킴으로써 현실감을 획득하고 작품의 미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특히 그는 비극적인 빈궁에 대해 동정적이었고, 그 빈궁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욕을 보여 주었다.

 이 작품은 죽음을 거부하려는 할머니의 허망한 몸짓과 이를 지켜보는 가족들의 이기적이고 작위적인 행동을 통해 인간의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내면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임종을 앞에 둔 인심과 인정을 실감 있게 포착하고 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자손들이 '조모주 병환 위독'이라는 전보를 받고 모인다. 그러나 '나'는 할머니의 임종을 앞두고 벌어지는 자손들의 모습에서 천륜으로 얽힌 끊을 수 없는 정보다는 요식 행위와도 같은 형식적인 인간의 모습들을 보게 된다. 더욱이 할머니에게 효를 다하는 중모(仲母)에게서 '나'는 효가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 보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간파한다. 즉, 중모의 행위가 도덕적 우월의 표시임을 깨닫는다. 결국, 한고비를 넘기고 할머니의 죽음이 시일을 끌자 자손들은 모두 흩어지고 할머니는 외롭게 죽는다.

 

 

 현진건의 초기 작품엔 <행복> <희생화> <빈처> <술 권하는 사회> <타락자> 「할머니의 죽음」<운수 좋은 날> <불> 등의 단편을 들 수 있다. 이 중에서 그 발전상의 질적 변화로 보면 <빈처> 할머니의 죽음을 그 첫 단계로 볼 수 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대부분 1인칭 화자의 고백 형식을 통하여 작가 자신의 체험을 그대로 토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운수 좋은 날> 이후의 작품에서는 3인칭을 도입하여 작중인물의 삶을 좀 더 치열하게 묘사하기 시작하였는데, 그의 대표 단편들이 이 시기에 속해 있다.

 현진건은 김동인과 더불어 우리나라 근대 단편 소설을 발전시켰으며 염상섭과 함께 사실주의를 개척한 작가이기도 하다.  <빈처> <술 권하는 사회>(1921) <타락자>(1922) <불>(1925) <B 사감과 러브레터>(1924) 등은 그의 선명한 묘사, 정확한 표현, 빈틈없는 구성을 보여주는 사실주의적 단편들로 ‘한국의 체호프’라는 격찬을 받기도 하였다. 

  이 소설의 묘미는 구성적 측면에서 돋보여서 작가 지망생에게 '좋은 소설'의 본보기로 삼을 만하다. 즉, 어느 아름다운 봄날, 깨끗하게 봄옷을 갈아입고 친구들과 우이동 벚꽃놀이를 나가다가 사망 전보를 받는 마지막 장면은 객관적이면서도 극적인 효과를 낳는다. '조모주 병환 위독'이라는 전보로 시작하여 '오전 3시 조모주 별세'라는 전보로 끝나는 결구도 매우 탁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