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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이효석 단편소설 『들』

by 언덕에서 2023. 8. 21.

 

이효석 단편소설 『들』

 

 

이효석(李孝石, 1907∼1942)의 단편소설로 1936년 발표되었다. 1936년 『신동아』2·3월호에 발표되었다. 시적인 문체와 세련된 언어, 서정적인 분위기의 작품으로, 주인공 ‘나’는 인위적 세계를 벗어나 자연과 교감하면서 본능적 생활에 기쁨을 느낀다.초기 동반자 작가에서 자연 친화적 순수 서정의 세계로 눈을 돌린 이효석의 대표적 단편으로, ‘들’에 대한 묘사가 뛰어날 뿐 아니라 자연의 원초적 생명성, 건강함 등이 잘 나타나 있다.

 <메밀꽃 필 무렵>으로 잘 알려진 이효석은 1930년대 순수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이효석은 일제 강점기에 불안이 가중되는 시대 의식이나 민족의 수난 속에서도 독립 정신의 고취와는 무관한 작품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효석의 작품은 크게 생활의 미화(美化)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원형을 찾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효석은 일제 강점기 지식인의 방황을 표현하기보다는 <메밀꽃 필 무렵>에서와 같이 부자간의 정을 확인하는 혈연적인 주제 의식과 그 주제 의식을 나타내기 위해 많은 시적인 문장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설가 이효석 (李孝石, 1907&sim;1942)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학교를 퇴학 맞고 처음으로 도회에서 쫓겨 시골로 내려온 '나'는 변하지 않은 버들 숲 둔덕과 과수원의 모습을 보며 기쁨을 느낀다. 나는 들에서 전에 느껴 보지 못한 평안함과 따뜻함을 느끼며 들과 벗삼아 지낸다.

 어느 날 나는 개울 녘 풀밭에서 한 자웅의 개가 장난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곤 그것을 계속 지켜보다가 주위에 옥분이가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는 득추에게 가난하다고 파혼당한 처지이다. '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측은히 생각했고 그녀도 자기를 동정해 주는 '나'를 좋아했다.

 일요일이 되어 '나'는 문수와 같이 지내게 되었는데, '나'의 책을 학교에서 뺏길 뻔하였다고 문수가 이야기를 한다. '나'와 문수는 이 협착한 땅에 자유로이 책도 읽고 지낼 수 있고 아무리 자유로운 말을 외쳐도 중지당하는 법이 없는 '들'이 있음을 기쁘게 생각했다.

 어느 날 '나'는 과수원으로 몰래 딸기를 따러 가다가 옥분을 만나 하룻밤을 같이 자게 된다. 그 후 계곡에 고기를 잡으러 갔다가 옥분이와는 이제 남이 아니라는 생각에 골몰하다가 몸에 상처까지 입는다.

 문수와 함께 사냥 갔을 때, '나'의 상처를 보게 된 문수가 어찌된 일인가고 묻자 '나'는 옥분과의 일을 말해준다. 그러자 문수 또한 옥분과는 남이 아닌 처지라며 지난 일을 얘기한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무거운 감정이 가벼워짐을 느끼게 된다.

 그 후 문수는 정학 처분을 받았으나, 영영 학교를 쫓겨나게 된다. 그래서 '나'와 문수는 같이 지내게 되었는데, 어느 날 돌연히 문수가 끌려간 후 소식이 없게 된다. '나'는 문수가 돌아오면 함께 지낼 여러 가지 재미 있는 여름 계획을 세운다. 문수가 돌아오면 풋콩을 구워 먹이고 기름종개도 많이 떠 먹이고 씨름을 해서 몸도 불려 줄 생각을 한다.

 

 

 초록은 흙빛보다 찬란하고 눈빛보다 복잡하다. 눈이 보얗게 깔렸을 때에는 흰빛과 능금나무의 자줏빛과 그림자의 옥색 빛밖에는 없어 단순하기 옷 벗은 여인의 나체와 같은 것이―---봄은 옷 입고 치장한 여인이다.
 흙빛에서 초록으로―---이 기막힌 신비에 다시 한번 놀라 볼 필요가 없을까. 땅은 어디서 어느 때 그렇게 많은 물감을 먹었기에 봄이 되면 한꺼번에 그것을 이렇게 지천으로 뱉어 놓을까.   
       - 본문에서

 이 소설은 학교에서 쫓겨나 들을 벗삼아 사는 한 주인공의 이야기로, 세상 사회의 부자유스러움과 속박에서 벗어난 기쁨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에서도 <화분>과 마찬가지로 죄 의식이 전혀 없는 성(性) 의식이 나타나 있다. 즉, 들의 서정적인 배경 속에서 인간의 본능적인 행위는 자연적 욕구의 일부분이면서 도덕적 가치 이전의 근원적인 성격을 지닌다.

 이러한 이효석의 에로티시즘의 미학은 그의 자연 회귀 소설의 기저를 이루는 미학적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효석을 가리켜 흔히 ‘소설을 배반한 소설가’, 또는 ‘위장된 순응주의자’라는 단적인 표현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종래의 경향적 색채에서 탈피하여 자연으로의 회귀를 통한 인간의 근원적인 서정 세계를 구축했다는 의견과 상통한다.

 

 

 이효석의 소설은 이야기를 지닌 소설의 기본 형식을 부정하고 시적인 문체를 사용하여 서정소설이라는 독특한 형식을 만들어 냈다. 이효석의 작품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면은 그가 소재로 하는 대부분의 작품들이 도시적인 세련된 감각보다는 자연 친화적인 사상에 더욱 더 가깝게 다가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작품은 이효석 문학의 특성인 자연 친화적이며, 야성적인 힘의 세계를 동경하는 작가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즉, 그의 후기 소설의 특징인 서정성과 원초적 자연관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작품에는 퇴학당한 나와 문수의 독서 사건과 같은 부정적 시대 상황이 암시되고 있다. 하지만, ‘나’가 느끼는 행복의 구체적인 것은 들이 나에게 주는 신선한 행복이며, 옥분과의 사랑이다. 옥분과의 사랑도 결혼이라는 전통적인 가치관에 기대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화자는 현실적인 규제 내지는 도덕적인 규범을 벗어난 원초적인 행복으로서의 사랑을 찬양하고 있다. 나와 옥분과의 사랑은 도시적인 삶에서는 찾을 수 없는 야성적인 힘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나와 옥분이 만나는 장소에서 야성적인 기운으로 표현된다.

 처음으로 옥분을 만났을 때는 개의 자웅(雌雄)들의 교미(交尾) 장면이고, 두 번째 만남은 인공적으로 키우는 양딸기가 아니라 산딸기가 자라나는 곳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야성에 대한 동경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들에게 공포를 가져다주는 것은 자연화된 야성의 세계가 아니라 인공의 세계라는 것을 문수와 내가 잡혀가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따라서, 이 작품의 ‘나’에게 ‘들’이란 이런 야성의 세계를 뜻한다. 이 ‘야성’이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자연 친화적이며, 인공의 세계가 주는 공포가 없는, 평화로운 세계를 가리킨다. ‘들’에 나가 ‘나’가 보여주는 행위, 그리고 그곳에 있는 온갖 자연물에 대한 시각을 통해 자연이 얼마나 아름다우며, 신비한 힘과 생명력을 부여해 주는 공간인가를 표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