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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최독견 장편소설 『승방비곡(僧房悲曲)』

by 언덕에서 2023. 8. 25.

 

최독견 장편소설 『승방비곡(僧房悲曲)』

 

 
최독견(崔獨鵑(본명: 최상덕, 1901∼1970)이 지은 장편소설로 1927년 5월 10일부터 9월 11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작가의 대표작으로 1929년 [신구서림]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제목의 의미는 승방(僧房), 즉 스님의 방에서 일어나 슬픈 노래(悲曲)로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주인공 최영일이 고아 출신의 스님이었기 때문이다.
최영일과 김은숙 두 젊은 남녀의 숙명적인 비련을 그린 낭만적 색채가 짙은 작품으로 인간의 비극적 운명을 그렸다. 짙은 낭만성과 극적인 반전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한국 최초로 시도한 영화소설로 발표 당시 독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작자는 짙은 낭만성과 극적인 반전이 돋보이는 이 작품에서 남매의 비극적인 사랑을 통하여 인간의 운명을 리얼하게 표현하고 있다. 최독견은 이 작품 이후 사회 현실에 관심을 가지고 경향문학으로 전환한다. 
 최독견의 원작을 이서구가 각색하고 이구영이 감독한 영화 <승방비곡>은 1931년 [동양영화주식회사]가 제작했으며 이경선·김연실·윤봉춘·함춘하·정숙자 등이 출연했다. 당시로서는 8,000원이라는 많은 제작비를 들인 작품이었다. 이후 1958년 [한국영화사]에서 다시 제작한 영화 <승방비곡>은 1931년 영화의 배우였던 윤봉춘이 감독하고 이룡·엄앵란·정민·김신재·성소민 등이 출연했다.
 

영화 [승방비곡(Elegy)], 1958년 제작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동경여자음악학교를 졸업한 김은숙은 부산발 봉천행(奉天行) 열차에서 우연히 자리를 같이한 적이 있는 동경 불교대 학생인 최영일을 잊지 못한다. 영일은 운외사(雲外寺) 주지 최해엄 선사의 상좌인 천애고아 법운(法雲)이다. 한편 은숙은 서울의 숨은 부자인 이준식의 아들 필수의 집요한 구애를 받고 있다.
 은숙과 영일은 금강산에서의 해후를 계기로 친해지지만, ‘여자를 가까이하지 말라.’는 선사의 계율로 고민하다가, 서로 남매처럼 지낼 것을 약속한다. 그러던 중 은숙의 아버지 김창호는 그가 경영하는 청운학교의 운영 자금을 필수에게 빌리게 된다.  필수는 ‘수캐같이 추근추근하고 상노같이 비굴하고 데릴사위같이 온순하게’ 은숙에게 접근한다. 그러나 필수는 본처가 있고, 재령 나무리에는 그의 소작인의 딸 명숙을 유혹하여 낳은 딸이 있으며, 그녀를 실명하게 한 전과가 있었다.
 영일과 은숙은 차차 젊은 육체에서 타오르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괴로워한다. 그러다가 영일은 필수의 비열한 음모에서 은숙을 구해내고, 은숙에게 청혼한다. 그러나 이제는 은숙의 어머니가 둘의 결혼을 반대한다.
 결혼식이 있던 날 은숙 어머니는 자살한다. 그리고 어머니의 유서로 영일과 은숙이 한 남매였음이 밝혀진다. 영일은 은숙 어머니와 선사 사이에서 낳은 은숙의 오빠였다.

 
최독견은 1921년 중국 상해 혜령전문학원(惠靈專門學院) 중문과를 졸업한 뒤 [상해일일신문] 기자를 거쳐 [중외일보(中外日報)] 학예부장을 역임하였으며, 광복 후 [평화신문] 부사장, [서울신문] 편집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연극에도 관여하여 [동양극장] 지배인(1932), [연극협회] 이사(1940)를 역임하였으며, 박진ㆍ이서구 등과 신극단 [청춘좌(靑春座)]ㆍ[호화선] 등을 조직하였다. [상해일일신문] 기자로 있으면서 중편소설 <유린>(1921)을 연재하였으며, 이어 단편 <소작인의 딸>(신민. 1926.2.) <유모>(조선문단. 1926.6.) <푸로 수기>(신민. 1926.8.)를 발표하였다. 또, 번역소설 <한 사람이 차지해야 할 땅>(조선농민. 1926.8.)과 단편 <책략>(문예시대. 1926.11.10.) <고구마>(신민. 1927.2.) <바보의 진노>(조선문단. 1927.4.) 등 경향적 작품도 발표하였다. 그 뒤 단편 <조그만 심판>(동광. 1927.4.) <낙원의 부서지에>(1927.5.) 등을 발표하였다.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뒤 자살한 어머니의 유서로 남매임이 밝혀진다는 내용의 중편 「승방비곡(僧房悲曲)」(1927.5.10∼9.11)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여 많은 애독자를 얻었으며,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시도한 영화소설이 되었다. 그 뒤의 작품 경향은 초기의 경향적인 것에서 전환, 낭만적이며 감상적인 경향을 보이는 <자색(紫色) 봉투>(신민. 1928.10.) <향원염사(香園艶史)>(조선일보. 1928∼1929) <연애시장>(신소설. 1930.9), 광복 후에는 <낭만시대>(조선일보. 1964.11∼1965.7) 등을 발표하였다. 이밖에 단편 <괴뢰>(백민. 1950.2.) <양심>(신천지. 1951.5.) <애정무한성(愛情無限城)> 등이 있다.
 

 
 1920년대에 『승방비곡』으로 대중소설사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작가로 자리매김한 최독견은 주변의 비판에 굴하지 않고 대중들의 흥미를 최우선으로 고려한 작품들을 창작했다. 이는 그가 당대 작가 중에서도 작품의 수요처인 대중 독자를 명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또한 그의 문화적인 감각, 특히 상해의 국제적인 분위기 속에서 얻은 근대적인 것의 자각, 자유분방한 감각은 작품 안에서 대중 독자들이 원하는 공감 요소를 잘 수용해 드러내었다.
 식민지 시기의 독자들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던 『승방비곡』을 비롯한 최독견의 작품들은 1920년대뿐만 아니라 본격적인 대중소설의 흥성기였던 1930년대에 대중소설 붐을 매개했다. 그의 작품들은 1910년대의 신파 번안소설로부터 내려오는 구소설적인 요소와 영화적인 요소의 수용한 대중소설의 계보와 성격을 잘 보여준다. 당시 문단에서 정인섭에 의해 통속적 모더니스트로, 김기진에 의해 자연주의 작가로 지칭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단에서 거의 잊힌 채 통속적인 대중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이 사실은 예술소설과 통속소설의 구분이 어디까지인지 명확하지 않아 현대의 관점에서 보자면 아이러니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