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순 시집 『생명의 과실(果實)』
탄실 김명순(金明淳, 1896∼1951)의 창작집으로 1925년 4월 5일 서울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간행하였다. 4ㆍ6판 162쪽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이 작품집은 3부로 나누어져 있다.
제1부에는 <길> <내 가슴에> <싸움> <저주(咀呪)> <분신(分身)> <사랑하는 이의 이름> <남방(南邦)> <옛날의 노래> <외롬의 부름> <위로(慰勞)> <밀어(密語)> <재롱> <귀여운 내 수리> <탄식> <기도> <꿈> <유언(遺言)> <유리관 속에> <그쳐요> <바람과 노래> <소소(甦笑)> <무제(無題)> <탄실의 초몽(初夢)> <들리는 소리를> 등의 24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제2부는 감상문 또는 수필이라고 할 수 있는 <대중없는 이야기> <네 자신 (自身)의 위에> <계통(系統) 없는 소식(消息)의 일절(一節)> <봄 네거리에 서서> 등 4편이 수록되어 있다.
제3부는 <돌아다 볼 때>와 <의심(疑心)의 소녀(少女)>라는 소설 두 편이 실려 있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은 대부분 1920년대 초반에 발표된 것들로서, 시가 중심이 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작가는 시인으로서보다 소설가로서 그 작품 활동의 범위가 훨씬 폭넓었다고 할 수 있는데, 1920년대 초반에 발표된 소설로서 <칠면조> <꿈꾸는 날밤> 등의 주요 작품이 빠져 있다는 점은 특이하다.
♣
“이 단편집을 오해받아온 젊은 생명의 고통과 비탄과 저주의 여름으로 세상에 내놓습니다.”라는 짤막한 머리말이 붙어 있다. 이 책은 신문학사상 최초의 여성문인의 작품집이라는 점으로 더욱 주목된 바 있다.
여기에 수록된 작품 중에는 여성 특유의 외로운 심상을 느낄 수가 있다. 나혜석이나 김일엽의 작품과는 달리, 기교적으로 세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시로서의 수준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반면에 사회적인 성격은 완전히 배제해 버리고 여성의 심상(心象)만 노래했다. 즉, 여성 특유의 주정(主情)의 세계가 유니크하게 전개되면서 외롭고 그립고 스산한 감정을 더듬으며 서정의 세계를 개척하고 있다.
시집 「생명의 과실」의 서문을 보면, ‘젊은 생명의 바탄과 저주의 결실로 세상에!’라고 하듯이 사랑을 통해 여성의 세계를 간직하려고 했다. 역시 그도 나혜석처럼 화려한 청춘시절과는 정반대로 만년이 지극히 불우했는데, 그것은 개화기의 여성 지도자들이 겪는 필연적인 과정이기도 했다.
신문학 최초의 여류문인으로서 여성해방을 부르짖은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으며, 여자주인공의 내면심리를 치밀하게 묘사한 소설들을 많이 남겼다. 그의 시작품은 연정, 자연의 아름다움, 추억 등을 노래한 것이 주류를 이루며 소설은 인물에 대한 지적인 분석과 심리묘사에 치중하였다.
초기에는 소설에 가까운 산문체의 시를 썼는데, 주로 단순한 감정토로와 내부적 충동에서 빚어지는 위기의식, 현실과 이상이 타협되지 않은 현실적 파탄과 정신적 긴장을 노래했다.
싸움
늙은 병사가 있어서
오래 싸웠는지라
온 몸에 상처를 받고는 싸움이 싫어서
군기(軍器)를 호미와 괭이로 갈았었다.
그러나 밭고랑은 거세고
지주(地主)는 사나우니
씨를 뿌리고 김은 매어도
추수는 없었다.
이에 늙은 병사는
답답한 회포에 졸려서
날마다 날마다 낮잠을 자더니
하루는 총을 쏘는 듯이 가위를 눌렸다.
아―이상해라 이 병사는
군기를 버리고 자다가
꿈 가운데서 싸웠던가
온 몸에 멍이 들어 죽었다.
사람들이 머리를 비틀었다
자나깨나 싸움이 있을진대
사나 죽으나 똑같을 것이라고
사람마다 두 팔에 힘을 내뽑았다.
저주(咀呪)
길바닥에, 구으르는 사랑아
주린 이의 입에서 굴러나와
사람 사람의 귀를 흔들었다.
‘사랑'이란 거짓말아.
처녀의 가슴에서 피를 뽑는 아귀야
눈먼 이의 손길에서 부서져
착한 여인들의 한을 지었다.
‘사랑'이란 거짓말아.
내가 미덥지 않은 미덥지 않은 너를
어떤 날은 만나지라고 기도하고
어떤 날은 만나지지 말라고 염불한다.
속이고 또 속이는 단순한 거짓말아.
주린 이의 입에서 굴러서
눈먼 이의 손길에 부서지는 것아
내 마음에서 사라져라
오오 `사랑'이란 거짓말아!
분신(分身)
눈을 감으면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니고
남빛 안개속에 조약돌 길 위를
한 처녀 거지가 무엇을 찾는 듯이
앞을 바라보고 뒤를 돌아보고
새파랗게 질려서 뵈인다.
내 머리를 돌리면
분명히 생각나는 일이 있다.
삼년 전 가을에 흐린 아침이었다.
나는 학교에 가는 길가에서
나를 향해 오는 그림자를 보았다.
그리고 `어디를 가시요'하는
그 분명한 음성도 들었다.
그러나 나는 멈추는 그의 발걸음을
멈출 틈도 없이 쏜살과 같이
저의 앞을 말없이 걸어갔다.
그리고 내 마음 속에
겨우 삼년 기른 환상의 파란 새를
그 길 너머로 울면서 놓았다.
하나 이 명상의 때에
무슨 일로 옛 설움아 또 오는가.
사람에게 상냥한 내가 아니었고
새를 머물러 둘 내 가슴이 아니었다.
가시덩쿨 같은 이 가슴 속에서
옛 설움아 다시 내 몸을 상치 말라!
사랑하는 이의 이름
칠성아 칠성아
네 이름이 흔하건만
초당집 보비는 삼년 전부터
가만히 자라는 마음의 풀을
베어버릴 힘 없어서 `칠성'이라고
피로 쓰고 피로 지워 피로 샀다.
사람의 손이 가 닿지 않는 밭에
깨끗한 마음 속 깊이 자라는 풀이라.
칠성아 칠성아
저 냇가에는 노란꽃이 피면은
뚜렷한 달이 올라와서
가만히 피어있는 사랑의 꽃을
시들리지 않으려고 ‘그리움'을
빛으로 비치고 빛으로 받는다.
그러나 보비는 그늘에 우니
칠성아 칠성아 네 이름이 봉선화라.
남방(南邦)
북방의 처녀가 남방을 생각하면
울렁줄렁 달린 밀감밭을
허울 벗은 몸으로 지나더라도
명주옷을 입고 님을 만나러 가는듯이
가슴이 두군두군거려서
첫 일월에 우뢰소리가 휘어진 가지를 흔들고
황금의 여름을 딴다지오.
북방의 처녀가 남방을 생각하면
빨간 동백의 빈 동산을
철을 모르는 몸으로 지나더라도
님이 오시다 마신 듯이
심란한 한숨이 쉬어져서
초 사월의 비가 푸르른 잎을 궁글고
빨간 꽃을 떨어뜨린다지오.
북방의 처녀가 남방을 생각하면
초가집 처마 아래 우산 걷어 들고
우두커니 서서 눈물 지우더라도
조약돌 틈에 속삭이는 샘물같이
유랑하는 노래가 저절로 들려서
초저녁에 불비친 미닫이가 열리고
책상 앞에 석상(石像)이 움직인다지오.
옛날의 노래
고요한 옛날의 노래여
꿈가운데 걸어오는 발자취같이
들렸다 사라지는……
어머니의 노래여, 사랑의 탄식이어.
‘타방타방네야 너 어디를 울며 가니
내 어머니 몸진 곳에 젖먹으러 울며 간다'.
이는 내 어머니의 가르치신 노래이나
물결 이는 말못 밑에 이것만 아노라.
옛날의 날 사랑하시던 내 어머니를
큰 사랑을 세상에서 잃은 설움이
멜로디만 황혼을 숨지을 때
장미빛으로 열린 들길에는 바람도 애타라.
오래인 노래여 내게 옛 말씀을 들리사
어린이의 설움 속에 이끌어들이소서
불로초로 수놓은 초록옷을 입히소서
그러면 나는 만년청(萬年靑)의 빨간 열매같으리다.
말을 잊은 노래여 음조만 남아서
길 다한 곳에 레데강이 흐릅디까
모든 것을 씻어버리는 정화수가 흐릅디까.
오오 그 물이 내 거울이 되리다.
무언가(無言歌)여 다만 음향이여 나를 이끌어
그대의 말씀 사라진 곳에
내 어머니 몸진 곳에 산을 넘고 물을 건느라
옛날의 노래여, 사라지는 울림이어.
위로(慰勞)
우는 이어
나의 벗이어
벗의 눈물을 씻어
우리들의 환상을 그린
봄 하늘의 아름다움을 보라.
벗이어
우리는 먼저
침묵을 약속하였었다.
모든 거인(巨人)들이 지킨 것을
우리는 이게 그윽한 옛 길 위에서.
그러나 벗이어
우리는 너무 말했다.
가비야운 내 입이
또 무거우나 참기 어려운
벗의 입이…….
벗이어
벗은 벗의 마음을
바람의 팔랑가비인줄 믿느뇨?
물 위에 떴다 사라지는
물거품인줄 아느뇨?
하나 벗이어
우리는 보지 않는가.
봄 하늘 위에 솟은
우리들의 낙원을
우리의 시선의 모이는 초점을.
탄식
둥그런 연잎에 얼굴을 묻고
꿈 이루지 못하는 밤은 깊어서
비인 뜰에 혼자서 서른 탄식은
연잎에 달빛같이 허득여들어
지나가던 바람인가 한숨 지어라.
외로운 처녀 외로운 처녀 파랗게 되어
연잎에 연잎에 얼굴을 묻어.
그때까지 조선의 민중
너희는 피땀을 흘리면서
같이 살 길을 준비하고
너희의 귀한 벗들을 맞으라.
기도
거울 앞에 밤마다 밤마다
좌우편에 촛불 밝혀서
한없는 무료를 잊고지고
달빛같이 파란 분 바르고서는
어머니의 귀한 품을 꿈꾸려.
귀한 처녀 귀한 처녀 서른 신세되어
밤마다 밤마다 거울의 앞에.
유언(遺言)
조선아 내가 너를 영결(永訣)할 제
개천가엔 고꾸라졌던지 들에 피 뽑았던지
죽은 시체에게라도 더 학대해 다구.
그래도 부족하거든
이 다음에 나같은 사람이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대로 또 학대해 보아라.
그러면 서로 미워하는 우리는 영영 작별된다.
이 사나운 곳아 사나운 곳아.
유리관 속에
뵈는 듯 마는 듯한 설움 속에
잡히운 목숨이 아직 남아서
오늘도 괴로움을 찾았다.
작은 작은 것의 생명과 같이
잡히운 몸이거든
이 설움 이 아픔은 무엇이냐.
금단의 여인과 사랑하시던
옛날의 왕자와 같이
유리관 속에서 춤추면 살풀 믿고
일하고 공부하고 사랑하던
재미나게 살 수 있다기에
미덥지 않은 세상에 살아왔었다.
지금이 뵈는 듯 마는 듯한 설움 속에
생장(生葬)되는 이 답답함을 어찌하랴.
미련한 나! 미련한 나!
소소(甦笑)
일찍 핀 안즌뱅이
봄을 맞으려고
피었으나 꼭 한 송이
그야 너무 적으나
두더지이 맘 땅속에 숨어
흙 패어 길 갈 때.
내 적은 꼭 한 생각
너무 추웁던 설움에는
구름 감추는 애달픔
그야 너무 괴로우나.
감람(甘藍) 색(色)의 하늘 위에 숨켜서
다시 한 송이 피울 때.
(평양서)
무제(無題)
나는 들었다.
굶은 이에게는 밥 먹으란 말 밖에 안 들리고
음부(淫夫)에게는 탕녀의 소리 밖에 안 들리고
난봉의 입에서는 더러운 소리 밖에 안 나오는 것을.
탄실의 초몽(初夢)
힘 많은 어머니의 품에
머리 많은 처녀는 웃었다.
그 인자한 뺨과 눈에
작은 입 대이면서
그 목을 꼭 끌어안아서
숨 막히시는 소리를 들으면서.
차디찬 어머니의 품에
머리 많은 처녀는 울었다.
그 냉락(冷落)한 어머니를 보고
어머니 어머니
왜 돌아가셨오 하고 부르짖으며
누가 미워서 그리 했소 하고 울면서.
춘풍에 졸던 탄실이
설한풍에 흑흑 느끼다
사랑에 게으르든 탄실이
학대에 동분서주하다
여막에 줄 돈 없으니
돌베게 베고 꿈에 꿈을 꾸다.
꿈에 전같이 비단 이불 덮고
풀깃 잠들어 꿈을 꾸니
우뢰는 울어오고
빗방울이 뚝뚝 듣는다.
탄실은 화닥닥 몸을 일으키어
벽력 소리에 몰리어
힘껏 달아났다.
달아날수록 비와 눈은
그 헐벗은 몸에 쏟아지고
요란한 소리는 미친 듯 달려들다
그는 나무그늘에 몸을 숨겼다.
왼 하늘이 그에게 호령하다
‘전진하라 전진하라'.
그는 어린 양같이
두려움에 몰리어서
헐벗은 몸 떨면서도
한없이 달아났다.
그 동안에 날은 개었더라.
청답살이 둘러심은 푸른 길에
누군지 그의 손을 이끌다.
그러나 그는 호올로였다.
(경도(京都)서)
☞김명순(金明淳, 1896∼1951) :
소설가, 시인, 언론인, 영화배우, 연극배우. 1896년 평안남도 평양군 융덕면에서 태어났다. 1913년 진명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시부야 국정여학교에 편입하였으나 중퇴했다. 1917년 잡지 [청춘]의 현상소설 모집에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1919년에는 일본 유학길에 올랐으며 도쿄에 체류 중인 소설가 전영택의 소개로 당시 일본에 유학 중인 문학가들이 창간한 종합문예 동인지 [창조]의 동인으로도 참여했다.
1925년에는 한국 여성 시인 최초로 시집 『생명의 과실』을 간행하기도 했다. 그 밖에도 평론가, 극작가, 기자, 배우로 활동을 하며 5개 국어를 능통한 번역가였다. 영국 작가 애드거 앨런 포의 『상봉』,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 꽃』과 게르하르트 하웁트만의 『외로운 사람들』을 최초로 번역했다.
그 외에도 단편소설 「처녀의 가는 길」(1920), 「칠면조」(1921), 「외로운 사람들」(1924), 「탄실이와 주영이」(1924), 「돌아다볼 때」(1924), 「꿈 묻는 날 밤」(1925), 「손님」(1926), 「나는 사랑한다」(1926), 「모르는 사람같이」(1929) 등과 시 「동경」(1922), 「옛날의 노래여」(1922), 「거룩한 노래」 「시로 쓴 반생기」(1938), 시집 『애인의 선물』(1928) 등의 작품을 남겼다. 2000년까지 밝혀진 김명순의 작품은 시 86편(번역시 포함), 소설 22편(번역소설 포함), 수필·평론 20편, 희곡 3편 등이다.
일본 유학 시절의 자유로운 연애 활동으로 화제가 되었으며, 이광수, 김일엽, 나혜석, 허정숙 등과 함께 자유 연애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김동인의 소설 〈김연실전〉의 모델이기도 하다. 김동인은 연실(김명순)의 불행한 한 생애를 서술하면서 한국의 근대화에 나섰던 여러 선각자들 중에는 연실이와 같은 빗나간 예도 있었다는 비판을 시도한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후에 그에 대한 연구에서 그는 '자유 연애'를 주창하기 보다는 차라리 성적으로 보수적이었으며 여성에 대한 과도한 억압과 편견이 내재된 시대적 상황으로 인한 오해와 난무한 유언비어의 희생양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1927년 김명순은 영화 '광랑(狂浪)'의 주연으로 캐스팅된 이후 '아름다운 시절', '꽃장사' 등 몇 편의 영화에도 출연하였다. 1925년 「생명의 과실」이라는 시집을 간행한 한국 최초의 여성 시인이며, 그 외에 많은 산문과 희곡 및 극본을 남기기도 했다. 근대 신문학의 대표적 문인의 한 사람으로, 여성 해방을 부르짖은 선구자적 구실을 하였으며, 작품에서는 주인공의 내면심리를 현실적이고도 치밀하게 묘사하기도 하였다. 또한 칼럼니스트와 언론인으로도 활동하였다. 개인적인 생활고와 사랑의 실패, 여성 해방론에 대한 사회의 반발과 공격 등으로 인해 불우한 삶을 살았다.
김명순의 소설 작품은 인물에 대한 지적인 분석과 심리 묘사에 치중하고 있으며, 시 작품은 연정, 자연의 아름다움, 추억 등을 노래한 것이 주류를 이룬다.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한 탄실은 그의 필명이자 아명이기도 하다. 일본 유학 중 당한 성폭력 사건 이후 각종 스캔들에 휘말리다 끝내 가난과 정신병을 이기지 못한 채 1951~1953년 무렵 일본 도쿄 아오야마 뇌병원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암울했던 식민시기와 더불어 기생의 딸이라는 낙인, 성폭력, 문단의 공격 등 여성에 대한 억압이라는 이중고를 겪으며 활동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소설가로서 5개 국어를 구사하며 서양 문학을 조국에 선보인 번역가이기도 하다. '자유연애'를 역설하며 여성해방을 꿈꾼 신여성이자 선각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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