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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오상원 장편소설 『백지(白紙)의 기록』

by 언덕에서 2023. 10. 9.

 

오상원 장편소설 『백지(白紙)의 기록』

 

소설가·언론인 오상원(吳尙源. 1930∼1985)의 장편소설로 1957년 [사상계]에 연재되었다. 그의 다른 작품 <모반>과 함께 [동인문학상] 수상 후보에 올라 호평을 받았던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의과대학 3학년에 재학 중 군의관이 되어 전쟁에 참가했던 형 중섭은, 팔다리를 하나씩 잃은 불구의 몸으로 돌아왔으며, 상과대학 재학 중 전쟁에 나갔던 동생 중서는 정신적인 부상을 입고 돌아온다. 이 두 아들이 전쟁의 상처를 이기고 다시 일어서는 얘기가 단편소설 「백지의 기록」이다.

 오상원은 이데올로기의 갈등으로 빚어진 인간문제를 집요하게 파헤치는 소설을 썼다. 그는 불문학을 전공해 프랑스의 행동주의 문학과 실존주의 문학을 접할 수 있었고, 이어 발표한 <균열(龜裂)>(문학예술. 1955.8) <증인>(사상계. 1956.8)은 실존주의적 성격을 잘 보여준 작품이다. 또한 그는 한국의 전후작가로 손꼽히는데,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모반>(현대문학. 1957.11)과 장편소설 「백지의 기록」(사상계. 1957.5∼12)은 이러한 평가를 뒷받침하는 작품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의과대학 재학 중에 군의관으로 입대한 중섭은 중위의 계급장을 달고 야전 병원에 배치되었다. 휴전 협정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적의 공격이 일층 가열해져서 매일같이 부상병들이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어느 부슬비 내리던 날 밤, 중섭은 일선 연대장이 부상을 입었다는 급보를 듣고, 앰뷸런스에 몸을 싣고 포탄이 작렬하는 일선으로 달려간다.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연대장을 태우고 되돌아 나올 때, 한 부상당한 일등병이 앰뷸런스 앞으로 뛰어나오면서 살려 달라고 소리치지만, 한 병졸 때문에 연대장을 죽일 수 없다는 부관의 협박에, 부상병을 버려두고 야전 병원으로 돌아온다.

 연대장을 야전 병원에 인계한 중섭은 다시 앰뷸런스를 몰아 그 부상병을 찾아 일선으로 달렸지만, 길가에 쓰러져 이미 숨진 상태였다. 돌아오기 위해 다시 앰뷸런스로 달려가던 중섭은 적의 포탄을 맞고 쓰러진다. 그리고 야전 병원으로 옮겨져 손을 절단하고,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고 생명은 건지지만, 이미 그의 육체적 부상과 함께 극도의 정신적인 좌절감에 빠져든다.

 집에 돌아온 뒤에도, 심한 좌절감과 절망에 빠져 몸뚱이가 된 팔목을 짓찧어 피를 내기도 하고, 집안 식구들에게도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을 드러내 보이기까지 한다. 그리고 자살을 기도했다가 실패하기도 한다. 중섭은 마침내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거기서 병원장 조수로 일하고 있는 준이란 중학 동창을 만난다. 준 역시 전쟁에 나갔다가 얼굴조차 몰라볼 정도로 얼굴이 일그러진 부상을 입은 청년이다. 번득거리는 한쪽 눈알, 콧구멍이 하나 짜부라지고 오른손은 손가락 세 개가 없어져 버렸다. 그러나 같은 부상병이면서도 준은 중섭보다 훨씬 더 건강한 정신을 갖고, 정신 의학을 연구해서 정신과 의사가 되어있었다.

 준은 중섭을 데리고 전상(戰傷) 환자들이 재기하여 일하고 있는 ‘우리들의 마을’로 간다. 그곳에서 중섭은 눈먼 사람, 다리 없는 사람, 팔 없는 사람 등 모두가 밝고 건강한 모습으로 열심히 살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우리들의 마을’에서 중섭은 정상적인 건강을 되찾게 된다.

 한편, 부상을 입지 않았으나, 정신적인 공허에 시달리는 동생 중서는 자기 마음을 덮고 있는 어둠을 헤치려고 애쓰지만, 그것은 마치 파문이 지나가면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서는 수면처럼 걷히지가 않는다. 자기를 다시 가다듬기 위해 책들을 모아놓고 뒤적이지만, 몇 페이지를 못 읽고 내동댕이쳐 버리곤 한다. 책 속에 자신을 몰입시킬 만큼 그는 지속적인 긴장을 유지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적인 탄력성을 상실해 버렸다. 그는 아무 곳에도 정착되지 않는 수많은 시간을 무엇인가로 채워야 했다. 백지처럼 펼쳐진 시간을 메우기 위해 그는 다방에 나가 앉아 담배를 피워대고, 술을 마시고, 성순희라는 여자를 사귀며 삶의 공허 속을 헤맨다. 마침내 그는 전쟁에서 상처 입은 정연을 정신병원에서 만난다. 정연 역시 전쟁의 피해자이다. 완전히 기억을 상실해서 옛날의  애인인 중서의 얼굴조차 못 알아볼 정도로 심한 기억 상실증에 걸려 있을 뿐 아니라, 일선에서 당했던 기억 때문에 남자를 무서워하는 피해 망상증까지 보인다.

 병원의 지극한 간호와 중서의 도움으로 정연은 정상적인 인간으로 돌아오지만,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어머니를 낯선 땅에 묻고 일선 지대를 헤매다 몸을 버린 가책을 못 이겨내고, ‘전쟁이 나에게 남긴 상처는 너무도 가혹했다’는 편지를 남기고 자살한다. 시체실에서 흐느끼는 중서에게 형 중섭은 오히려 위로의 말을 던진다.

  “중서야, 그렇다고 낙심할 건 없어. 정연이는 죽었다만, 나를 보렴. 우리는 더 꿋꿋이 살아야지.”

 정연이를 공동묘지에 묻고 돌아온 날 밤, 오랜만에 한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인다. 전쟁의 회오리바람이 스치고 지나간 뒤에 처음으로 가족의 따뜻한 정을 맛보는 자리였다.

 

 

 오상원의 앙드레 말로식의 행동주의 또는 기법상의 의식의 흐름 역시 전후세대의 여러 실험과 연결된다, 오상원은 전쟁 속에서 전쟁을 그리고 정당들이 난무하던 시대에 그 난무를 그려나갔다. 그가 소재로 다루고 있는 것은 해방 직후의 무수한 정당의 난립과 그 소요 속에서 죽어가는 인간 생명의 의미에 관한 것과, 6ㆍ25 이후의 그것으로 크게 대별할 수 있다. 6ㆍ25가 이데올로기의 선택 가능성의 여지가 전혀 없는 상태이고, 다만 극한상황을 지켜보고 고발하는 형식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해방 직후의 소용돌이를 그린 작품이 좀 더 건실하다.

 오상원은 전후 문학파로 분류할 수 있는 작가이다. 그는 주로 전쟁 때문에 가치 없이 죽어가는 인간들과 그 때문에 파괴될 수밖에 없는 개인의 삶 등에 관심을 보였다. 대부분의 전후 문학파 작가들처럼 그도 전후 세대가 경험했던 암울한 분위기와 허무 의식을 형상화했지만 전후의 분위기를 극복하고 사회적 불합리에 맞서 개인의 가치와 삶을 옹호하는 자세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이데올로기의 갈등으로 빚어진 상황 앞에 던져진 인간의 실존적 문제를 집요하게 탐구하였다. 그의 작품은 보편적인 휴머니즘을 기조로 생명의 존엄성이라는 주제를 형상화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6ㆍ25 전쟁이 끝나는 바로 그때부터 이 소설은 시작된다. 의과대학 재학 중에 군의관으로 전쟁에 나가 팔다리 하나씩을 잃고 돌아온 중섭과 제대하여 복학한 중서, 이들 두 아들 사이에서 잠을 못 이루는 부모, 그리고 중서와 사귀었던 성순희ㆍ이정연도 그들 나름대로 전쟁을 겪었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전쟁을 겪고, 자기 나름대로 절망한 이들이, 전쟁에서 받은 육체적ㆍ정신적 상처를 어떻게 처리하고 극복할 것인가를 문제 삼고 있다.

 작가는 단편소설 <모반>에서는 8ㆍ15 해방 직후 정당 사이에 일어난 갈등으로 인해 청년당원들이 일으키는 테러를 주요 문제로 다루면서 진정한 애국과 인간다운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고, 「백지의 기록」에서는 전쟁으로 인한 정신적ㆍ육체적 불구와 그로 인한 문제 및 치유과정을 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