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참고자료

나운규 시나리오 『아리랑』

by 언덕에서 2023. 7. 24.

 

나운규 시나리오 『아리랑』

 

 

일제강점기 영화감독·영화배우·시나리오 작가 나운규(羅雲奎. 1902∼1937)의 무성 영화 극본으로 1926년에 발표되었다. 당시 상영관의 스크린에는 배우들의 움직임만 나오고, 배우들이 입만 벙긋벙긋하면서 변사가 소리를 내는 형태였다. 이 글은 그런 변사 해설용 극본으로 작품의 주제가 항일 민족정신으로 일관하면서도, 우리의 전통 민요인 '아리랑'과 접맥시킴으로써 민족의 혼을 되살려 놓은 작품이다.

 [조선키네마 프로덕션]의 두 번째 작품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나운규가 시나리오, 감독, 주연을 맡았는데, 항일 민족 영화라 할 수 있다. 흑백의 무성 영화로 국권 피탈 상황을 상징적으로 처리하는 등 촬영 기법의 새로움과 몽타주 등 기법의 탁월함, 주연 나운규의 열연 등이 어우러져 초창기 한국 영화의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1930년과 1936년에 그 후편이 만들어져 3부작이 되었으나, 1926년판 필름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항일 운동의 새로운 양식을 시사해 준 영화 「아리랑」은 민족 영화의 각성제 역할을 하였으며,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사실주의에 입각한 화면 구성을 보이는 수작이다. 아울러, 작품의 주제가 항일 민족정신으로 일관하면서도, 우리의 전통 민요인 '아리랑'과 접맥 시킴으로써 민족의 혼을 되살려 놓은 글이다.

 

나운규프로덕션에서 만든 빈민애화 〈잘 있거라〉(1927년)를 제작하던 때의 나운규: 자료출처 [월간조선]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와 함께 제1권이 시작되면 ‘개와 고양이’라는 자막에 이어서 변사의 해설이 시작된다.

“평화를 노래하고 있던 백성들이 오랜 세월에 쌓이고 쌓인 슬픔의 시를 읊으려고 합니다. ……서울에서 철학공부를 하다가 3ㆍ1 운동의 충격으로 미쳐버렸다는 김영진이라는 청년은……”

영화 속에서 광인(狂人) 영진(나운규 扮)은 낫을 휘두르며 오기호(주인규 扮)를 쫓아간다. 기호는 이 마을의 악덕지주 천가(千哥)의 머슴이며 왜경의 앞잡이이기도 하다. 영진은 온 마을사람이 송충이처럼 미워하는 기호를 이처럼 증오하며 왜경과 마주쳐도 찌를 듯이 낫을 휘두른다.

 한편 영진에게는 영희(신일선 扮)라는 여동생이 있으며, 그는 광인 특유의 사랑으로 영희를 아낀다. 어느 날 서울에서 영진의 대학동창생 윤현구(남궁운 扮)가 그의 친구를 찾아 이 마을로 온다. 그러나 영진은 현구를 알아보지 못하고, 영희가 오빠를 대신하여 그를 맞이한다. 영진의 불행을 걱정하는 두 남녀 사이에 어느덧 순수한 애정이 싹튼다.

 마침 마을에서 풍년의 농악제가 열린 날 고약한 머슴 기호가 마을을 기웃거리다가 혼자서 집안일을 하고 있는 영희를 보고 그녀를 범하려 든다. 이때 현구가 돌아와 기호와 격투를 벌이게 된다. 영진도 이 자리에 있었지만 정신이상자인 그의 눈에는 두 남자의 격투가 마치 재미있는 장난처럼 보여 히죽히죽 웃기만 한다.

 그러던 영진이 환상을 본다. 사막에 쓰러진 한 쌍의 연인이 지나가는 대상(隊商)에게 물을 달라고 애원한다. 그러자 상인은 물 한 모금 대신 여자를 끌어안는다. 그 순간 영진이 낫을 번쩍 들어 후려친다.

 그 순간 대상은 사라지고, 영진의 낫에 찔려 쓰러진 것은 기호였다. 이때 영진은 기호가 흘린 피를 바라보다 충격을 받으며 맑은 정신을 되찾는다.

 이 자리에 영진의 아버지, 교장선생, 천가, 그리고 일본순경 등과 마을사람들이 모여든다. 어느새 영진의 손에는 포승이 묶인다. 영진은 그를 바라보고 오열하는 마을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분, 울지 마십시오. 이 몸이 삼천리강산에 태어났기에 미쳤고 사람을 죽였습니다. 지금 이곳을 떠나는, 떠나려는  이 영진은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갱생의 길을 가는 것이오니 여러분 눈물을 거두어주십시오…….”

이러한 변사의 해설과 함께 영진은 일본순경에 끌려가고, 주제가 <아리랑>이 남아 흐른다.

 

〈아리랑〉 성공 직후의 나운규(왼쪽)와 〈아리랑〉의 일본 상영을 알리는 신문 광고: 자료출처 [월간조선]

 

 주인공 영진은 3ㆍ1 운동 때 잡혀서 일제의 고문으로 정신 이상이 된 민족 청년이다. 그가 미워하고 죽이게 되는 인물 기호는 일제에 아부하는 반민족적인 인물이다. 정신 이상자가 아니면 올바로 살 수 없었던 일제 강점기 그리고 정신 이상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써 검열을 벗어날 수 있었던 작품의 전략이 놀랍다.

 영화의 촬영도 당시로서는 드물게 우리 농촌의 생생한 현장을 사실주의적인 기법으로 묘사하여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남상(濫觴)을 이루었다. 또한 작품 속에서 기호를 살해하게 되는, '대상'의 환상 장면의 설정과 처리는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나란히 배치한 몽타주 기법으로 크게 찬사를 받았다. 그렇지만 역시 이 영화의 가장 큰 감동은 작품 전체의 주제를 항일 민족정신으로 높이고 그것을 전통 민요인 아리랑과 연결, 승화시킨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삽입된 민요 '아리랑'은 당시 관객의 심금을 울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영화 「아리랑」은 나운규의 각본ㆍ감독ㆍ주연의 1인 3역의 무성영화다. 한국영화사상 가장 초창기에 제작된 명작으로 1926년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제2회 작품으로 제작되었다. 나운규 감독의 데뷔작품이기도 하다. 당시의 우리 영화는 1919년에 김도산이 극단 [신극좌]에서 만든 연쇄극 <의리적 구투(仇鬪)> 속에 약 1,000피트의 필름을 제작, 삽입함으로써 영화사의 기점을 이루었다.

 그 뒤 필름에 의한 완전한 영화가 만들어지기는 1923년 윤백남이 [민중극단]을 이끌고 제작한 <월하(月下)의 맹세>가 최초로서, 당시의 작품들은 대부분 외국영화의 번안 모방물이거나, 개화기 신파물ㆍ통속 사극물 등 그야말로 유치한 활동사진에 지나지 않았다.

 서구의 문물이 밀물처럼 들어오던 개화기 한반도가 일제의 무력에 의해 식민지가 된 지 10여 년, 영화 「아리랑」은 이러한 역사적ㆍ사회적 배경 아래에서 제작되었다. 그리고 1926년 10월 1일, 당시 박승필이 경영하던 [단성사]에서 개봉된 <아리랑>은 그야말로 이 땅의 민중들에게 일대 충격을 안겨준 혁명적인 영화가 되었다. 그 이유는 이 작품이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항일민족정신을 그 주제로 하였으며, 작품 또한 영화사상 초유의 예술성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나운규(羅雲奎. 1902∼1937)는 한의(韓醫) 형권(亨權)의 6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12년에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신흥학교 고등과로 진학, 1918년에는 만주 간도에 있는 명동중학에 들어갔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학교가 폐교됨으로써 1년여 동안 북간도와 만주지방을 유랑했다.

 이때 독립군단체와 관련을 맺으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청회선터널폭파미수사건'의 용의자로 잡혀 1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친 뒤 1923년 출감하였다. 1924년 부산에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설립되자, 부산으로 내려가 연구생이 되었다.

 조선키네마가 제작한 윤백남(尹白南) 감독의 <운영전(雲英傳)>에 단역인 가마꾼으로 첫 출연, 연기력을 인정받아 1925년 [백남프로덕션]의 제1회 작품인 <심청전>에서 처음으로 주역(심봉사역)을 맡아 연기파 배우로 인정받았다. 이듬해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농중조(籠中鳥)>에 출연하여 절찬을 받음으로써 일약 명배우가 되었다. 그는 배우로 만족하지 않고 직접 영화 만들기를 결심하고, 독립운동을 배경으로 한 저항적인 작품 <아리랑>과 <풍운아>를 직접 쓰고 감독ㆍ주연을 맡아 영화계의 귀재(鬼才)로 불리게 되었다.

 1927년에는 윤봉춘 등과 함께 나운규프로덕션을 창립하여 <옥녀(玉女)>, <사나이>, <사랑을 찾아서>를 만들었고, 1929년에는 격조 높은 문예영화 <벙어리 삼룡>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독립투쟁하는 늙은 나팔수를 그린 영화 <사랑을 찾아서> 때문에 일본경찰에게 붙잡힐 뻔하였다. 대중적 인기는 절정에 달했으나 무질서한 사생활로 회원들이 떠나 다른 영화사를 창설함으로써 [나운규프로덕션]은 해체되었다. 그 뒤 박정현의 원방각사(圓方角社)와 손잡고 <아리랑 후편>, <철인도(鐵人都)>를 만들었고, 우리 영화계에서 꺼리던 [도야마프로덕션(遠山 Production)]의 <금강한(金剛恨)>에도 출연하였다. 이 때문에 나운규의 인기는 하루아침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생활을 위하여 배구자(裵龜子) 일행의 악극단 무대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1931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영화계를 1년여 동안 시찰하였고, 1932년에 귀국하여 윤봉춘을 비롯한 옛 동지들을 모아 영화 <개화당이문(開化黨異聞)>을 만들었으나, 검열로 많은 장면이 잘린 채 개봉되었기 때문에 흥행에서 큰 실패를 보았다. 같은 해 이규환(李奎煥)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에 주연으로 출연하여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이 시기는 제2기에 해당하는데, 이때의 작품들은 <무화과>, <강 건너 마을>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문명비판ㆍ사회비판 등 부정정신을 나타낸 것들이다. 그 밖에 <종로>, <칠번통(七番通)의 소사건>, <그림자> 등을 제작했으나 실패작이었다. 이 때는 그에게 가장 불우했던 시기로서, 극단 [신무대(新舞臺)]나 현성완(玄聖完)이 이끌던 극단 [형제좌(兄弟座)]를 위하여 연쇄극(連鎖劇 )을 만들어 지방으로 순회공연을 다녔다.

 1936년 우리나라 영화계에 획기적 선풍을 일으킨 발성영화가 등장하자, 나운규는 <아리랑> 제3편을 발성영화로 제작하였다. 그는 계속 문예작품의 영화화에 주력하였는데, 이때 이태준(李泰俊)의 소설 <오몽녀(五夢女)>를 영화화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은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혼신의 정열을 기울여 예술적 승화를 이루었으나, 오랫동안 무리를 거듭한 탓에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어 죽음으로써 최후의 작품이 되고 말았다. 이 시기가 제3기이다. 그가 일관되게 추구한 예술 테마는 식민통치의 억압과 수탈에 대한 저항, 통치권에 결탁한 자본가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의 모든 작품은 약자에 대한 동정을 담고 있으며, 악덕ㆍ난륜(亂倫)에 대한 신랄한 고발과 풍자를 담고 있다.

 영화인으로 활동한 약 15년 동안 29편의 작품을 남겼고, 26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직접 각본ㆍ감독ㆍ주연을 맡은 영화가 15편이나 된다. 그의 영화사적 위치는 그대로 우리나라 영화 자체의 성장과정이라 볼 수 있다. 그는 투철한 민족정신과 영화예술관을 가진 최초의 시나리오작가일 뿐 아니라, 뛰어난 배우양성자이며 연기지도자였다. 그는 민족영화의 선각자이며, <아리랑>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기고, 영화의 정신과 수준을 크게 끌어올린 불세출의 영화작가로 평가된다.

 【시나리오】<아리랑>(1926) <풍운아>(1926), <임자 없는 나룻배>(1932)

 【출연작품】<운영전> <농중조(籠中鳥)> <심청전> <개척자> <장한몽(長恨夢)> <아리랑>(1926) <임자 없는 나룻배> <오몽녀> <풍운아> <들쥐> <흑과 백> <금붕어> <잘 있거라> <옥녀> <사나이> <사랑을 찾아서> <철인도(鐵人都)> <금강한(金剛恨)> <개화당 이문(異聞)> <무화과> <칠번지 소사건(七番地小事件)>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