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녀 단편소설 『어떤 파리(巴里)』
박순녀(朴順女.1928∼ )의 단편소설로 1970년 [현대문학]지에 발표되었다. 1970년도 [현대문학 신인상] 수상작이다. 작품은 모든 사람들이 동경하는 도시라 할 수 있는 파리에서 간첩 혐의로 잡혀 온 진영이를 놓고, 홍재와 지연간의 토론과 회상으로부터 시작된다. 의사의 부인인 지연은 학교 때의 친구 진영이 동백림(東伯林) 간첩 사건으로 연루, 구속되자 고향의 친구이며 시인인 홍재를 찾아가 예술과 사랑을 위한 진영이 결코 공산주의자일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 구명해 줄 것을 부탁한다. 그러나 홍재는 그것을 거절했고, 그와 헤어져 귀가하던 지연은 자동차 사고를 입는다.
1970년 [현대문학 신인상]을 받았던 이 작품에서는 <동백림 사건>을 은유화하여, 반공 이데올로기의 폭압적 체제 내부에서 감시받는 전향한 지식인 남성의 공포를 소재로 냉전 체제 하 한국 정치사의 폭압성을 고발한다. 열정적인 창작 활동으로 박순녀는 1988년 <비단 비행기>로 [한국소설문학상], 1999년 <기쁜 우리 젊은 날>로 [펜문학상]을 수상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진영, 홍재, 지연 등 세 남녀는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친구들이다. 이제 홍재는 시인이 되었고, 진영이는 남편을 따라 간첩 행위를 범했다. 과거의 성장 과정으로 보면, 도저히 그렇게 될 수 없는 신분이건만, 남편을 따라 살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돼 버렸다.
지연은 현재 외과 의사의 아내로서 평범한 주부에 불과하다. 지연은 진영의 소식을 듣고, 진영의 구명을 위해 애를 쓴다. 누구보다도 그의 성장 과정을 잘 알고 있는 홍재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 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홍재는 증언할 것을 거부한다. 의용군으로 입대했다가 포로로 석방된 자신의 신분을 옹호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언젠가 어떤 증언을 하러 갔다가 ‘검은 차’의 빛깔에 완전히 압도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빛의 마법’. 그것은 사유(思惟)를 혼란으로 모는 것이었다. 진상으로부터 도피를 꾀하게 하는 것이었다, 자아와 진상의 충돌에서 도피하는 나를 발견한다.
이러한 현상은 다음의 장면에서도 볼 수 있다. 즉, ‘우리 선생을 돌려달라’고 철없는 초등학교 학생들이 벌인 데모의 주동자를 찾기 위한 수사관들과 아홉 살짜리 아들과의 심야의 대좌에서도 엿보게 된다.
“B국민학교 3학년 2반에서 오늘 데모가 있었지?”
수첩의 사나이는 물었다. 아홉 살의 어린이를 놓고 순 직업적일 수는 없겠으나, 그것은 사회 봉사 관념으로 굳어진 압력조의 목소리였다.
“왜 데모했지?”
“우리 선생님 도루 오시라구요,”
“어떻게 시작됐지?”
“어떻게라니요?” 명쾌하게 반문한다.
“응, 말하자면, 누가 하자고 해서 시작했냐 말이야.”
“우리들이요.”
“그런 생각을 누가 맨 먼저 했냐 말이다.”
“내 옆의 아이가요.”
“그 아이 이름이 뭐냐?”
조서와 수첩의 두 사나이가 함께 흥분을 보인다.
“몰라요.”
“왜?”
“내 옆에 누가 있었는지 모르겠는걸요.”
“잘 생각해 봐. 누가 하라고 했지, 맨 먼저?”
이것은 수사관과 아홉 살짜리 아들과의 대화이다. 수사관의 말은 주동자를 찾아내기 위한 유도 심문이고, 아이는 아이대로 대답이 흐리다. 지연이가 진영의 구속에서 직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당국에서는 진영이를 간첩 활동의 협조자로 판단하지만, 지연은 진영이가 남편의 사랑에 순(殉)한 것으로 짐작한다.
이 작품은 대타적(代打的) 관계에 있어서의 자아의 성실성을 찾아내려고 한다. 하나의 극한 상황에서의 자아 발견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과 사회와의 충돌이라고도 볼 수 있다. 즉, 대자와 대타와의 충돌이기도 하다. 이 충돌 속에서의 자기 발견이다. 한계 정세에 놓인 구체적인 인간의 모습을 소설로 제시하면서 대결하지 않을 수 없는 나, 그 대결로부터 진정한 나를 일깨우고 있다. 이것이 이 작품의 철학적 의미이다.
작가의 소설에는 인간애를 그리워하여 찾으면서도, 그것을 찾음에 있어 이지적으로 추구한다. 한결같이 여성 중심의 세계요, 여성 그것에의 이해와 이해를 촉구하면서도 휴머니즘적 애정으로써 옹호하고, 이성으로써 사리를 판단한다. 바로 이것이 그의 소설적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부드러운 필치로 전개해 가면서도, 사건을 제시함에 리얼리티로 추구해 가는 섬세한 문장, 애정 속에서 이지로 판단하는 비평 정신은, 독자로 하여금 새로운 인생의 해석과 이해를 불러일으킨다.
♣
이 소설은 상투적인 줄거리에서보다 별개의 회상적 에피소드로 정치라는 메카니즘, 분단된 상황, 폐쇄적인 정신 구조, 그에 대항하는 인간의 진실, 자유주의적인 휴머니즘, 순수한 사랑의 좌절을 묘사하는 데서 권력과 인간을 대결시켜 주목할 만한 효과를 거둔다.
작가는 초등학생의 항의 데모 배경을 조사하는 기관원, 스스로 반정부적인 제스처를 자랑하는 소영웅주의의 홍재, 그리고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인간에의 신뢰로 생명을 구한다. 또 자신이 살 수 있었던 체험을 이야기하는 의사, 소녀 시절의 낭만을 고수한다. 그 낭만을 함께 나눈 친구를 위해 증언하라는 자연의 모습을 통해 폐쇄적인 정치권력에 마지막 남은 저항의 근거로서 파리가 상징하는 자유와 사랑과 예술에의 집념을 재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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