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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이제하 단편소설 『초식(草食)』

by 언덕에서 2023. 6. 2.

 

이제하 단편소설 『초식(草食)』

시인·소설가·화가 이제하(李祭夏. 1937~)의 단편소설로 1972년 [지성]지에 발표되었다. 이 작품은 실체가 아닌 민중을 실체로 착각한 인물의 파탄을 그린 소설이다. 19회 [현대문학상] 수상작이다. 상이 주어졌을 때 그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여 문단에 파문과 충격을 던졌다. 모든 문학상이 일반적으로 너무 무난히 주어지며 과열된 문협선거에 얽힌 문단정치에 혐오감을 느꼈다는 게 수상거부의 이유였다.

 이제하의 소설은 독특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구체적인 줄거리나 명백한 테마를 배제하며, 회화적인 문체와 시적인 상승, 또는 초현실적 비유를 아주 많이 사용한다.

 또한, 그의 소설은 매우 난해한 분위기를 나타낸다.  작품 대부분은 구체적인 줄거리, 명백한 테마를 배제하여 회화적인 문체와 시적인 상징 또는 초현실적인 암유를 극도로 활용하는 매우 난해한 분위기의 소설이다. 이 작가의 창작은 사건이 불투명하고 비현실적이며, 인간이 추상적으로 묘사되어 작가 스스로 ‘환상적 리얼리즘’으로 명명하고 있는데, 전통적 수법을 파기하는 그의 이 같은 실험은 오히려 그 경이로운 효과를 통해 잔인한 현실의 진상을 직선적으로 전달해 주고 있다. 그의 창작 세계는 사건이 불투명하고, 비현실적이며, 인간이 추상적으로 묘사되는데, 이를 작가 스스로 ‘환상적 리얼리즘’이라 부른다. 전통적 수법을 파기하는 그의 이 같은 실험은, 그 독특한 기법을 통해 잔인한 현실의 진상을 충격적으로 전달해 주는 데 성공하고 있다.

시인, 소설가, 화가 이제하(李祭夏.1937~)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돈 한 푼 없이 매번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서광삼(徐光三)은 민주주의 신봉자로, 늘 꼴찌표를 얻고 수모를 당하면서도, 의원이 꼭 되고야 말겠다는 신념을 버리지 못한다. 자전거에다 도시락을 매달고 선거 유세에 나서는 인물이다.

 세 번째 출마를 위해 부친이 채식을 시작하자, 우리 집은 선거 참모라는 친척과 그 친척의 친척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첫 번은 6명 중에서 두 번째로, 두 번째는 8명 중에서 첫 번째로, 부친은 꼬리로부터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부친의 유일한 이해자는 숙당 조문제 선생으로, 그에 의하면 부친의 망발은 단지 젊었을 때 글께나 좀 읽었다는 탓일 따름이고, 모든 난점은 ‘흐르는 세월’이 심판해 준다는 것이었다.

 12명의 후보들이 날뛰는 주객전도의 광란 속에서 합동 유세의 날이 오고, 거기에서 뜻밖의 작은 사건으로, 이 양양하던 입후보자는 드디어 백팔십도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합동 유세장에서 우연한 사건으로 죽마고우인 최 씨와 만난 아버지는 쫓고 쫓기는 달음박질 끝에 모든 것을 결판내는 마지막 심지를 뽑게 되었다. 그것은 과거의 한 여자에게서 비롯된 라이벌 관계에 있어서 아버지의 패배였으며, 부친은 그 이후 채식을 그만두게 되었다.

 4ㆍ19가 일어나자 부친은 의심쩍은 듯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나흘이 지나자, 아버지는 무엇인가를 깨닫고, 하루가 더 지난 저녁에 나를 데리고 3년 전 그도수장에 갔다. 아버지는 하층민의 고통을 집약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장소가 거기라고 생각한 것이다. 상대를 않으려는 도수장 주인 앞에서 부친은 손가락 하나를 끊어 가지고 긴 광목에 풀 초, ‘草’ 자를 적어 보였다.

 5ㆍ16 쿠데타가 일어난 사나흘 뒤 한낮에 갑자기 요란스럽게 대문이 두들겨졌고, 대문 밖에는 한 무리의 군중과 도수장 주인이 서 있었다. 아버지가 혈서를 쓴 것은 4ㆍ19가 난 뒤였으나, 도수장 주인은 4ㆍ19와 5ㆍ16 군사 혁명을 같은 것으로 착각하여, 아버지의 열망에 감동하여 찾아온 것이다. 소까지 끌고 와 동네 사람들을 위해 잔치를 열어주겠다고 도수장 주인이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감격해했다. 혁명을 축하하는 잔치는 옛 공민학교 운동장에서 열렸고, 도끼가 도수장 주인의 손에 쥐어지자, 우리는 그 솜씨에 감탄했다. 훌륭한 도살자는 두 번 내리치지 않는다.

 그리고 드디어 짐승이 조용히 무릎을 꿇고, 한 무더기 피와 함께 무너졌던 그가 뒤틀린 입을 떡 벌린 표정으로 천천히 일어나서 어느 허공을 향해 섰을 때 우리는 쓰디쓴 환멸을 느꼈다.

  

 얼음 도매 배달을 하는 부친이 세 번째 국회의원 출마를 앞두고 다시 채식을 시작하셨다. 누이와 나는 4년마다 오는 홍역을 어떻게 치를지 걱정이다. 친척들은 또 모여들어 집을 어수선하게 만들고 있다. 아버지의 채식은 아주 오래전 구약성경의 <다니엘서>에서 그 연유가 비롯되었다. 난세의 여러 조짐에 관하여 그 책은 다루고 있었다. 아버지가 <다니엘서>를 읽었다고 확신할 수 없지만 선거에 지친 아버지의 입에서 다니엘의 절규와 똑같은 말이 흘러나오는 것을 나는 들었다.

  “나를 사자 아가리에 처넣어 보시오! 펄펄 끓는 불 속에 나를 콱 던져 보시오! 내한테 어디 평생 풀만 먹여 보시오! 끄덕도 안 할 것이오! 나는, 여러분…….”

 협잡과 중상모략으로 선거가 혼탁해질 때마다 아버지는 바다에 가서 선거의 고충을 씻어버리고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했다. 그러나 합동유세장에서 언짢은 일로 아버지는 채식을 멈추었다. 선거일을 앞두고 아버지는 나와 어디에 함께 가자고 하셨다. 그곳은 다름 아닌 변두리 언덕 뒤에 숨듯이 서 있던 도수장(도살장)이었다. 아버지는 ‘서광삼 기호 3번’의 플래카드를 어깨에 두르고 건물로 들어섰다. 부친은 도수장의 주인에게 절을 하고 무언가 열변을 토했지만 이내 도수장의 주인은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한식경이 지난 뒤에 부친은 다시 도수장 문을 두드렸으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 작가의 창작은 사건이 불투명하고 비현실적이며, 인간이 추상적으로 묘사되어 작가 스스로 ‘환상적 리얼리즘’으로 명명하고 있는데, 전통적 수법을 파기하는 실험은 오히려 그 경이로운 효과를 통해 잔인한 현실의 진상을 충격적으로 전달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 환상적ㆍ자기 분열적 묘사는 오히려 독자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시켜 내면과 혼란스러운 세계, 인간과 외부의 응고된 관계에 대한 공포감을 야기시켜 준다. 이 작품 속에 흐르고 있는 기본적인 물줄기는 '일탈과 해방의 욕망'이다. 그의 소설은 삶을 구속하는 이데올로기와 제도, 그리고 이데올로기와 제도의 바탕이 되는 일상적 생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해방의지로 가득 차 있다.
 작품 속 도수장은 어떤 폭력적인 이미지, 죽음의 이미지가 지배하고 있는데, 이는 당대의 체제를 상징하는 장소이며 공간이다. ‘나’의 부친이 도수장에 스스로 찾아가 무어라 설득하거나, 혈서를 쓰고 자꾸만 배회하는 것은 기독교가 주는 포용의 의미, 교화의 의미, 회개의 의미를 연상시킨다. 달리 생각하면 표를 얻으려는 행위일 수도 있다.
 

 이 작품은, 정치적 광기와 혁명의 열풍, 폭력의 위압과 군중의 맹목, 인간의 무력과 허망한 목적을 위한 무의미한 노력들이, 줄거리가 제거된 고도의 상징으로 변용, 확인할 수 없는 문맥으로 모자이크 되었다. 그의 다른 소설의 경우처럼 이 작품의 분위기 역시 정체 없는 공포감이 엄습한다.

 

 

 1960년 4.19가 터지고 부친은 네 번째 출마를 염두엔 둔 듯했다. 부친은 3년 전처럼 도수장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부친은 이번에는 광목 한 폭을 꺼내 그것을 땅에 펴고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몇 번의 실패 끝에 손가락 하나를 물어 끊고, 손가락으로 풀 초(草) 자를 쓰기 시작했다. 도수장 주인은 어딘가 웃고 있는 듯도 보이고, 어디에다 대고 침을 뱉는 것도 같다. 오직 나의 기억에는 도수장 주인의 상식 이상으로 큰 마디진 두 손뿐이다. 아버지는 의기양양하게 웃음을 내게 띠어 보였다. 그때부터 자신감이 붙었는지 아버지는 틈만 나면 그 도수장 주변을 배회했다. 61년 5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그 사나흘 뒤 한낮에 도수장 주인이 아버지를 찾아왔다. 

 “혁명이오, 서 선생 혁명입니다!. 서광삼 선생…….”

 게다가 도수장 주인은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잔치까지 베풀기 위해 큰 황소 한 마리를 기꺼이 바쳤다.

 옛 공민학교 운동장에서 소를 잡는 과정이 보이고, 나는 어둠 속에서 홀로 짐승을 죽이는 것과 명명백일하에 소를 잡는다는 것은 전혀 다름을 직감한다.... 어딘가 틀려먹었다. 이제 나의 부친은 유명을 달리하셨고, 정치인과 유권자는 바뀐 게 없으며, 그리고 도살장 주인은 우리 시의 명물이 되었다...

 5.16 군사쿠데타가 성공하고 음지에 가려있던 도수의 행위가 공민학교라는 열린 공간에서 벌어졌을 때 는 어딘가 틀렸다고 생각한다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마음의 도수자를 깨닫게 된다. ‘는 예의 그 마음의 도수자가 선거를 협잡과 중상모략으로 혼탁하게 만든 장본인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결국 소의 죽음과 함께 환멸이 찾아온다.

 이 작품은 돈 한 푼 없이 매번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서광삼이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서광삼은 민주주의 신봉자로서는 늘 꼴찌 점수를 받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국회의원이 되고야 말겠다는 신념을 버리지 못한다. 자전거에다 도시락을 매달고 선거유세에 나서는 인물이다. 따라서 『초식』은 민주주의의 실체가 아닌 사람을 민주주의의 실체로 착각한 인물의 파탄을 그린 작품이다.

 


☞도수장(屠獸場) : 「명사」 고기를 얻기 위하여 소나 돼지 따위의 가축을 잡아 죽이는 곳.=도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