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ㆍ하나님’의 어원
‘하느님’과 ‘하나님’은 다른 것 같은 유리 표기 태도이다, ‘하느님’은 일반적으로 쓰이는, 하늘에 계신 유일신이시며, ‘하나님’은 특별히 예수교에서만 쓰이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천도교에서는 ‘한울님’이요, 대종교에서는 ‘한얼님’이라 하기도 한다. 이 모두가 ‘하늘에 계신 분’이다. 비록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는 삼라만상을 주재하시며, 길흉화복을 관장하신다. 그는 전지전능하시다. 그는 땅 위를 항상 굽어보고 계시다.
“이놈! 하늘이 무섭지 아니하냐?"
사람으로서 차마 못할 짓을 하는 이에게는 이와 같이 매도한다. <수호전>에 나온 송강 일당은, ‘하늘을 가름하여 도를 편다(替天行道)’는 기치를 들고 나섰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은, 항상 바르고 옳은 존재였기 때문의 말이다.
모든 신화ㆍ전설이 이 하느님으로 이어진다. 이 세상 사람들은 따지고 보면, 그 하느님의 자손들이다. 우리의 할아버지인 단군께서도 이 하느님의 자손이시니, 그의 아버지 환웅이 곧, 하느님인 환인의 아드님이었다. 우리 백의민족도 하느님의 자손인 셈이다.
이 ‘하느님’이란 말의 시작을 ‘한발’이라 생각하는 학자는 무애 양주동이다. ‘발’은 ‘밝’이니, ‘한발’이라면 ‘대광명’ 혹은 ‘대국원(大國原)’의 뜻이 된다. ‘ㅂ-ㅂ순경음-ㅇ’의 음운전변에 의해서 ‘한발-한알’로 된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아주 먼 옛날에는 '한발'로 발음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오늘날엔 그 전거가 없는 채, 다른 그와 비슷한 음운전변 현상으로 미루어 '밝'이라는 우리 겨레의 근본사상과 함께 일단 어학적으로 그렇게 해석할 수 있을 법하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도 생각이 미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한눌’이 그것이다, ‘눌’은 ‘누리’ 또는 ‘뉘’로서의 ‘세상’이라는 뜻이니, ‘큰 세상’이라는, 말하자면 ‘대세계(大世界)라는 뜻으로서의 '한눌'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알’이라는 말의 시작이. 구극은 ‘발’에 기원을 둔 것이라고는 하더라도, ‘한알’의 경우, ‘알’ 쪽에 좀 더 큰 비중을 두는 뜻풀이를 할 수 없을 것이냐 하는 점이다. ‘큰 알(大卵)’ㆍ‘큰 시작’ㆍ‘큰 모체(母體)’ㆍ‘큰 근원(根源)‘ 같은 뜻으로서의 '한알'에서 '하늘'이란 말의 기원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날의 우리 신화ㆍ전설ㆍ설화에서, 한 시조의 탄생이 난생으로 이어지던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신라를 세운 왕 박혁거세(朴赫居世: 밝불거뉘)는, 망아지가 알을 품고 있다가 뛰쳐나갔다. 그 알에서 태어난 것이 박혁거세였다.
그 밖에도 그 비슷한 얘기는 많다. 짐승이나 사람이 알알 낳았다. 하도 이상해서 갖다 버린다. 그러면 시와 짐승들이 그 알을 보호하며 노래를 부른다. 그래서 거기서 태어난 것이 고주몽이기도 하고, 금와이기도 하다.
‘알’이라는 것은 우리 조상들에게 있어서 사물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시작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커다란 시원으로서의 '알'이 곧 '한알-하늘' 아니었겠느냐는 얘기가 억설일 수만도 없다. 그러한 하늘이었기에 삼라만상은 곧 당신의 것이었다. 당신이 낳으시고, 당신이 기르시고, 또 당신이 주재하시는 것이었다.
‘한알’에서 ‘하날-하늘’로 표기가 바뀌어온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따라서 ‘ㄹ’이 떨어져 나간 ‘하느님’이나 또는 ‘하나님’이나 역시 ‘한알님’에서 출발된 말이다. 이런 뜻에서 ‘한얼님’의 ‘얼’ 역시 ‘알’에서 갈려나간 말이니, '얼'은 ‘알’의 ‘가시적인 사물의 핵심’에 비겨, ‘비가시적’인 영(靈)으로서의 핵심이라는 점이 다를 것이다.
‘알’에서 덧붙여 이야기하자면, 그에서 다시 ‘울’로 바뀌어도 뜻은 ‘上’이며. ‘長’이고 ‘大’였다. 백제의 이른바 ‘위례성’이 ‘울(우리)기(잣)’의 표기여서 ‘영장성(靈長城)’의 뜻을 갖는다거나, 고구려의 ‘을지문덕’의 ‘을지(乙支)’가 ‘울치’여서 ‘대관(大官)’의 뜻을 갖는다는 따위는 근세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한울님’ 역시 천상에서 모든 것을 주재하시는 ‘하느님’과 적어도 어학상으로는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울’ 얘기기 났으니 뱀꼬리처럼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 ‘위례성’의 ‘울기’가 보인 바와 같이, ‘울’은 결국 한 동아리의 안전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도 새끼 치기에 이르렀다. 말하자면, 이해관계를 함께 하는 자들의 핵심과도 같은 것이었다. 훨씬 후세로 오면서 유리(吾等)나 우리(檻) 같은 뜻으로, 혹은 울(墻) 같은 뜻으로 차츰 갈려나갔던 것임을 알게 해 주고 있다.
사실 하느님을 생각할 때 ‘커다란 우리(吾等)’라 짐작해 보는 것은, 철학적인 측면이 없는 것도 아니다.
- 박갑천 : <어원수필(語源隨筆)>(19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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