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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朋滿座

역사 왜곡과 「광화문 괴담」

by 언덕에서 2023. 5. 23.

 

역사 왜곡과 「광화문 괴담」

 

 

2022년 8월 월대 복원을 포함해 1,068억 원이 투자된 대규모 공사를 마친 광화문광장이 개장했다. 공사의 근거는 풍수지리로 조선 수도 한성이 건설됐는데 그걸 간악한 일제가 비틀었으니 이를 바로잡기 위해 광화문 앞을 갈아엎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런데 ‘풍수설에 입각하여 광장 복원을 주도한 전 국가건축정책위원장은 이렇게 답했다.

 “풍수상의 근거가 없다.”

 공사가 다 끝나가는 마당에 자신의 풍수지리 주장이 근거 없음을 인정한 것이 ‘광화문 괴담’의 전말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는 이념, 권력욕, 국뽕사관에 사로잡혀 조작된 수많은 괴담은 역사의 탈을 쓰고 사회 곳곳을 떠돌고 있다. 저자는 ‘직시하는 사실의 역사만이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신념으로 곳곳에 뿌리내린 괴담을 추적했다.

 위의 ‘광화문 괴담’처럼 현대에 벌어지고 있는 괴담부터 과거의 시대상황과 목적에 따라 조작된 괴담까지 이 책은 광범위한 사료와 취재, 철저한 고증을 통해 파헤치고 고발한다. 저자는 ‘괴담’을 ‘진실의 탈을 쓴 거짓의 역사’라 정의한다. 역사를 입맛에 맞게 조작해온 전문가들과 진실이 되어 버린 거짓을  드러내어 알리는 이 책은 독자들이 통설로 알고 있던 역사의 실체를 발견하게 만든다.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은 “전설도 사람들이 믿으면 진실이 된다”고 했다. 대중이 흥미로워 할 만한 이야기를 해주면 거짓도 진실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괴담의 실체를 고발한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눈앞의 역사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기보다 왜곡과 진실을 분별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저자는 "광화문 괴담" 16개를 해체하고 무질서하게 널린 사료들 속에서 진실을 나열한다. 주된 내용을 요약한 해당 단락은 다음과 같다.

1) 청와대가 천하 명당이라고? → 흥선대원군이라는 권력자는 가짜뉴스를 만들어서라도 권력을 가지고 싶었다.

2) 풍수지리로 조선 수도 한성을 만들었다고?   조선의 도읍지 한성은 풍수를 거부하고 만든 실용적 계획도시다.

3) 조선 500년 동안 광화문 앞에 ☞월대(月臺)가 있었다고? →  세종이 광화문 월대 공사를 금지시켰으며 임진왜란 때도 존재하지 않았다. 광화문 월대는 1866년에 완공되었다.

4) 일본군 말() 위령비가 조선 왕실 제단이라고?  문화재청과 유홍준이 말하는 '하늘에 제사지내던 남단'은 조선 왕실 제단과는 상관 없는 일본군 포병부대의 군용 말() 위령탑이다.

5) 고종이 ‘고종의 길’을 통해 러시아공사관으로 달아났다고?  1896년 당시 이 길은 사방이 막혀서 고종이든 누구든 통과가 불가능했다.

6) 남대문이 임진왜란 일본군 개선문이라고?   가토 기요마사가 남대문으로 입성한 사실과 남대문 '국보 1호'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7) 총독부가 경희궁을 없앴다고? →  식민지가 되기 42년 전인 1868년 경복궁이 중건되었을 때 이미 경희궁은 폐허였다.

8) 원나라가 고려왕을 강제로 사위로 삼았다고?   고려가 자발적으로 몽골 쿠빌라이에 청하여 사위국이 되기를 원했다. 

9) 베트남 호찌민이 <목민심서>를 읽었다고? →  호찌민은 <목민심서>를 읽기는커녕 정약용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다.

10) 추사 김정희가 명필 이광사 현판을 떼버리라 했다고?   역사서 어디에도 해당 사실이 없다.

11) 선조가 류성룡의 반대로 명나라 망명을 단념했다고?   류성룡이 선조의 망명을 반대했지만 선조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결국 선조는 명나라에게서 망명을 거부당했다.

12) 정조가 조선 학문 부흥을 이끈 왕이었다고?   정조는 성리학 이외의 학문을 모두 이단이라고 규정하고 탄압했다.

13) 실학이 조선에 영향을 미쳤다고?   조선의 실학이 세상에 처음으로 등장한 때는 1930년대 일제시대였다. 실학은 18~19세기 국가 정책에 전혀 사용되지 못했고 관련서적도 전혀 출판되지 못했다.

14) 의병장 최익현이 대마도에서 아사순국餓死殉國했다고?  최익현은 사흘만에 단식을 풀고 4개월 뒤 병사했다.

15) ‘헤이그 밀사 이준'은 할복 자살했다고? 헤이그 밀사들은 회의 참석이 거부됐고 이준은 숙소에서 병사했을 뿐이다.

16) 일본의 주권 침탈에 고종은 굽히지 않고 싸웠다고?    고종은 을사조약 체결을 반대했던 의정부 참정 한규설을 "온당치 못한 행동을 했다"며 조약 당일 파면했다.

 

 

 책 내용 전부를 나열하면 장황하게 되니 저자가 지적한 위의 16개 항목 중 몇 가지만 보도록 하자.

5) 고종이 고종의 길을 통해 러시아공사관으로 달아났다고?

 문화재청은 2018년 2년여의 공사 끝에 ‘고종의 길’을 복원했다. 이 사업에는 국비 25억원이 들었다. 이 길을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이용한 길이라고 판단한 근거는 한 장의 작은 지도였다. 이 지도는 미 공사관을 ‘대사관’이라고 표기하는 등 이상한 점투성이였다. 19세기 말의 지도가 아니라 현대 미국대사관에서 무슨 행사를 하면서 준비했던 일종의 약도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1897년 미 공사관이 제작한 지도를 보면, 문화재청이 ‘고종의 길’이라고 주장하는 ‘왕의 길(King’s Road)’은 사방이 담장으로 막혀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길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7) 일제가 경희궁을 헐었다는 얘기도 사실일까? 경희궁을 헐어버린 사람은 경복궁 중건에 매달렸던 흥선대원군이었다.

9) 호찌민이 <목민심서>의 애독자였다고? 답은 다음과 같다.

 언제부터인가 베트남의 국부(國父) 호찌민이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 애독자이며, 관리들의 부정·비리를 막을 수 있는 필독서라며 이 책을 주변에 권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베스트셀러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저자이자 노무현 정권 시절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 교수,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등이 이 이야기를 널리 퍼뜨렸다. 이 이야기를 인용한 칼럼 등도 많이 나왔다. 안재성이 2009년에 쓴 <박헌영평전>은 이 이야기에 살을 붙였다. 1929년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에 유학 중이던 박헌영이 호찌민에게 <목민심서>를 선물했다고 말이다. 이는  ‘가짜 뉴스’다. 유홍준 교수도 박석무 이사장도 자기들의 주장에 대해 근거를 대지 못했다. 1929년 호찌민은 모스크바에 없었고, 따라서 호찌민과 박헌영은 만난 적이 없다. 무엇보다도 <목민심서>를 비롯한 정약용의 저술집인 <여유당전서>가 출간된 것은 1936~1938년이었다.

 

 

 이런 식으로 저자는 한국인들이 ‘사실’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사실 아닌 사실’들을 가차 없이 파헤치면서, 이를 ‘괴담’이라고 규정짓는다. 이 괴담 중에는 ‘이준 열사가 만국평화회담장에서 할복자살했다’거나 ‘최익현이 대마도에서 아사순국(餓死殉國)했다’는 오래된 괴담도 있지만 앞에서 소개한 ‘베트남의 호찌민이 《목민심서》를 즐겨 읽었다’는 비교적 새로운 괴담도 있다. 모두 근거 없는 ‘가짜 뉴스’들이다. 저자는 조선 말기의 실학이나 ‘개혁군주 정조’ ‘을사조약을 거부했던 자주적 군주 고종’에 대한 허상도 벗겨낸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가짜 뉴스’의 전파자들 가운데는 앞에서 말한 유홍준 교수나 문재인 정권 시절 국가건축정책위원장을 지낸 건축가 승효상씨처럼 ‘진보 좌파’의 주장이 많다는 사실이다.

 추사 김정희와 전남 대흥사 대웅보전 편액에 얽힌 전설 혹은 괴담을 처음 소개했던 유홍준 교수는 저자 박종인 기자와의 통화에서 “모든 사람이 전설을 인정하게 되면 전설이 사실이 되는 거다. 굳이 ‘전설에 따르면’이라고 할 이유가 없다”고 강변했다고 한다. 근거도 대지 못하면서 호찌민이 《목민심서》 애독자였다는 설을 유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은 금년 1월 다산연구소 홈페이지에 ‘거짓말 천국에서 벗어나려면’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면서 ‘백 마디 말이 모두 믿을 만하더라도 한 마디의 거짓이 있다면, 이건 바로 도깨비 장난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한 정약용의 말을 인용했다. 팩트 앞에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저자 박종인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드라마틱한 진실, 극적인 역사는 의심해야 한다. 이거, 괴담 아닐까, 가짜 뉴스가 아닐까.”

 

 

 


☞ 월대(月臺) : 궁궐의 정전(正殿), 묘단, 향교 등 주요 건물 앞에 설치하는 넓은 기단 형식의 대(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