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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朋滿座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수상록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by 언덕에서 2023. 3. 2.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수상록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벨라루스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Светлана Александровна Алексиевич, 1948~)의 수필집으로 1983년 간행되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소설가도, 시인도 아니지만 자기만의 독특한 문학 장르를 창시했다. 일명 ‘목소리 소설(Novels of Voices)’로, 작가 자신은 ‘소설-코러스’라고 부르는 장르이다. 다년간 수백 명의 사람을 인터뷰해 모은 이야기를 Q&A가 아니라 일반 논픽션의 형식으로 쓰지만, 마치 소설처럼 읽히는 강렬한 매력이 있는 다큐멘터리 산문이다. 즉, 영혼이 느껴지는 산문으로 평가된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백만 명이 넘는 여성이 전쟁에 가담하여 싸웠다. 하지만 그들 중 그 누구의 이름과 얼굴도 기억되지 못한다. 이 책은 전쟁에 참전했던 200여 명 여성의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여성들은 참전하여 저격수가 되거나 탱크를 몰기도 했고, 병원에서 일했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전쟁 일부가 되지 못한다. 전쟁을 겪은 여성들에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그들은 전쟁 이후 어떻게 변했으며, 사람을 죽이는 법을 배우는 건 어떤 체험이었을까?
 이 책에서 입을 연 여성들은 대부분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전쟁 가담 경험을 털어놓는다. 여성이 털어놓는 전쟁 회고담은 전쟁 베테랑 군인이나 남성이 털어놓는 전쟁 회고담에서는 철저히 배제되어온 이야기이다. 이 책은 1985년 첫 출간 되었고, 2002년 저자는 검열에 걸러 내지 못했던 부분까지 추가하여 다시 책을 출간했다. 저자는 2015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한 우크라이나 시민이 12일(현지시각) 러시아군이 철수한 우크라이나 남부 헤르손에서 자국 군인을 껴안아 주며 환영하고 있다. 연합뉴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작가가 인터뷰한, 전쟁에 직접 참전했거나 전쟁을 목격한 200여 명의 여인은 우리에게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네들은 숭고한 이상이니 승리니, 패배니, 작전이니 영웅이니 따위를 말하지 않는다. 그저 전쟁이라는 가혹한 운명 앞에 선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여인들은 전장에서도 여전히 철없는 소녀였고, 예뻐 보이고 싶은 아가씨였고, 자식 생각에 애간장이 타들어 가는 엄마였다.
 처음 사람을 죽이고 엉엉 울어버린 소녀가 있는가 하면, 첫 생리가 있던 날, 적의 총탄에 다리가 불구가 돼버린 소녀, 전장에서 열아홉 살에 머리가 백발이 된 소녀, 전쟁에 나가기 위해 자원입대하는 날 천연덕스럽게 가진 돈 다 털어 사탕을 사는 소녀, 전쟁이 끝나고도 붉은색은 볼 수가 없어 꽃집 앞을 지나지 못하는 여인, 전장에서 돌아온 딸을 몰라보고 손님 대접하는 엄마, 딸의 전사 통지서를 받아들고도 밤낮으로 딸이 살아 돌아오기를 기도하는 늙은 어머니……
 

이차대전 때 소련의 여군들 . 사진 출처 : [조선일보] 유용원의 군사세계

 
 여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독자는 죽음이 맴도는 전쟁터 한가운데서 따뜻한 피가 흐르고 맥박이 뛰는 사람들을 만나고 인생들을 만난다. 평범하고 순박한 우리의 여동생과 언니 또는 누나와 엄마를. 전쟁 앞에 산산조각이 나버린 그네들의 일상과 꿈과 사랑을. 그래서 더욱 전쟁이 잔혹하고 무섭다. 여인들은 요란한 구호나 거창한 웅변 하나 없이 조용히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누구를 위한 전쟁인지 돌아보게 한다.
 이 책은 여자들의 전쟁에 관해 이야기한다. 남자들이 여자에게 하지 않은 전쟁 이야기, 전쟁의 민낯. 여자들은 전장에서도 사람을 보고, 일상을 느끼고, 평범한 것에 주목한다. 처음 사람을 죽였을 때의 공포와 절망감이라든지, 전투가 끝나고 시체가 사방에 널브러진 들판을 걸어갈 때의 끔찍함과 처절함을 말한다. 전장에서 첫 생리혈이 터져 나온 경험, 전선에서 싹튼 사랑 이야기도 있다. 그녀들의 눈에 비친 전사자들은 모두 젊거나 어린 병사들이다. 적군인 독일 병사도 아군인 러시아 병사도 모두 가엾기만 하다. 남자들은 자신들의 전우였던 여자들을 잊어버렸고 또 배신했다. 여자 전우들과 함께 거둔 승리를 빼앗고 독차지했다. 그렇게, 여자들의 전쟁은 잊혀버렸다.
 아이를 낳고 가족을 돌보는 가정이 여자들이 있어야 할 자리이지만,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쟁 제2차 세계대전은 여자들을, 심지어 어린 소녀들까지 전장으로 내몰았다. 조국과 가족의 이름으로 여자들은 총칼을 들고 전선에서 남자들과 똑같이 싸워야 했다.
 작가는 이처럼 전쟁에 직접 참전했거나 목격한 여자들 200여 명의 이야기를 정리해 한 권의 책에 담아냈다. 그들의 처절하고 가슴 아픈, 다양한 사연들을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로 가감 없이 들려준다. 그녀들 각각의 이야기는 200권의 소설과도 맞먹는 강렬한 충격을 준다. 평범한 소녀이고 아가씨였던 각 사연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침착하게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결국엔 그때의 고통에 눈물을 흘리고 비명을 지른다.
 

 
 1972년 대학 졸업 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브레스트 지방 베레사의 지역신문사 기자와 공립 학교 교사로 동시에 근무했다. 이듬해 민스크 지역신문에 취직한 후 저널리즘에 온전히 종사하기로 했다. 1976년에는 문학 잡지 [네만]에서 통신원으로 시작해 곧 보도부장이 되었다. 같은 해에 첫 서적 <나는 마을에서 떠났다>를 완성했다. 그러나 시골 주민의 도시 이주를 금한 소련 정부의 융통성 없는 여권 정책을 비판한 내용으로 인해 출판은 금지되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단편, 에세이, 르포 등 다양한 문학 장르를 시도했다. 당시 벨라루스 작가 알레스 아다모비치가 ‘집단소설’이라는 새로운 문학 영역을 개척하던 중이었다. 아다모비치는 알렉시예비치가 ‘있는 그대로의 삶을 묘사하는’ 자신만의 문학 방식을 모색하는 데 중요한 도움을 주었다. 이 방식의 궁극적 목표는 일상의 콜라주 형태로 개인 목소리의 합창을 만드는 데 있었다.
 1983년 탈고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이 아니다』에서 처음으로 이 방식을 도입했다. 이 책에서 작가는 세계 2차대전에서 전투원, 당원, 공무원으로 참전했던 소련 여군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녀들의 전쟁 중과 후의 운명을 연구했다. 그 후 2년간 책의 출판을 위해 검열과 투쟁하면서 알렉시예비치는 ‘대조국전쟁(세계 2차대전의 러시아식 표현)의 영광에 먹칠했다’라는 비난을 받았다. 결국, 소위 ‘반공 태도’로 인해 일자리마저 잃었다. 책은 소련에 페레스트로이카가 도래한 1985년에야 모스크바와 민스크에서 동시 출판되었다 (1987년 독일어, 1988년 영어 번역본). 러시아 국내에서만 2백만 부 이상 팔리며 독자와 비평가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작가는 책을 연극과 기록영화로도 각색하였고 영화 버전은 라이프치히 국제 기록영화 주간에서 [은비둘기 상]을 수상했고 2015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