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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엿보다’의 어원

by 언덕에서 2023. 5. 16.

 

‘엿보다’의 어원

 

 

 '피핑 톰(Peeping Tom)'이란 말이 있다. 영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엿보는 사람'인데, 특히 성적인 호기심에서 들여다보는 호색한(好色漢)을 이른다고 적혀있다. 그 말에는 유래가 있다.

 영국의 코벤트리 시는 11세기께 레오프리크 백작의 영지였다. 그는 좀 표독스러운 사람이었던 모양으로, 세금을 아주 되게 매겨서는 매구 재산을 긁어모았다. 그러나 마음 착한 그의 부인인 고다이버(Godiva)는 남편에게 세금을 줄이도록 요청했다. 냉혹한 백작은 이 말에 콧방귀만 뀌었지만, 한두 번이 아니고 몇 번이나 간청하므로 할 수 없이 그러자고 했다. 그러면서 단서를 달았다. 몸뚱이에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치고 코벤트리 시가를 말을 타고 한 바퀴 돌면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결국 ‘노!’나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백작부인이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을 백작 자신이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다이버 부인은 그렇게 하겠다고 나섰다. 백작의 행복과 주민의 행복을 위하여 그까짓 일을 못하겠느냐는 비장한 생각이었다.

 맨발의 백작부인 아닌, 벌거숭이 백작부인이 시가지를 돈다는 그날, 시민들은 그 부인의 은혜에 감사하여, 집안의 모든 문을 닫고 그 벌거벗은 모습을 안 보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거기에도 역시 이단자는 있었다. 양복점 직공인 톰이란 자가 이 약속을 깨고 슬며시 훔쳐 엿본 것이다. 그는 곧장 소경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피핑 톰’이란 말이 나오게 되었다. 엿보는 짓이다. 우리말에서도 엿본다고 하면, 떳떳하다는 것과는 하여간 거리가 멀다는 느낌이다. 엿듣는 것 또한 그렇다. 당당히 보거나 듣는 태도는 아니다.

 우리 중세어에서는 ‘엿다’ㆍ'엿우다'ㆍ'엿오다' 같은 말이 있는데, 이것이 곧 엿본다는 뜻이다. 지금도 지방으로 가면 '여수다'라는 말을 쓴다. 기회를 노린다든지, 엿듣는다는 뜻으로 쓰이는 것이다. 그 '엿'은 또 '여우(狐)'라는 뜻을 가졌다. 엿본다든지, 엿듣는다든지 하는 '엿'은 여기에서 왔다. '여수어보고', '여수어듣는' 것이다.

 코 큰 이의 동네에서도, 이를테면 이솝 이야기 같은 데서, 여우는 꾀 많고, 교활하고, 남을 둘러먹는 그런 동물로 나온다. 토끼가 꾀 많은 것은, 자위책 같은 것이지만, 여우의 꾀 많음은 본질적으로 남을 속이는 데 있다. 그것은 이쪽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여서, 굳이 팔미호(八尾狐)에 백여우가 아니더라도 여우는 사람을 홀려서 말려 죽이고 꾀를 부려 다른 동물을 둘러먹는 존재로 대표된다.

 그래서 보통 입겨룸을 하다가도 한쪽에서, “저 여우같은 년이……”하게 되면 듣는 쪽으로서는 보통 모욕이 아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팔을 걷어붙이고 악을 쓰며 달려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둔갑 잘하는 여우가 표준말로는 ‘여우’지만 지난날 ‘엿’이었기 때문에 지방에 따라서는 ‘여수’ㆍ‘여시’ 같이 말하기도 한다. 어쨌건 그 여우와 ‘엿보다’가 빗대어진 우리말에 묘미가 있다. 엿보거나 엿듣는 짓은 역시 여우 같은 짓이 아닐 수 없다. 정정당당하지가 못하고, 거기에는 그 교활한 회심의 미소 같은 것이 딸려 있을 법한 일이기 때문이다.

 부부간에는 의가 좋다는 여우, 되지 못하게 허영심만 잔뜩 부푼 도회지의 졸부 아낙네사 상당히 탐을 낸다는 그 가죽의 목도리……. 그런데 어째서 사람한테 밉보이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울음소리가 켁켁거린 데서 그리 된 것인가?

 

- 박갑천 : <어원수필>(197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