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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칠레 시인 네루다(Pablo Neruda.1904∼1973)

by 언덕에서 2023. 5. 5.

 

칠레 시인 네루다(Pablo Neruda.1904∼1973)

 

 

 

 칠레의 시인. 본명 네프탈리 리카르도 레이에스 바소알토. 칠레 중부 파랄 출생.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의 대학에서 철학ㆍ문학을 수학하였으며, 1927년부터 양곤ㆍ스리랑카ㆍ싱가포르 등지의 영사를 역임하고, 1934년부터 1938년까지 마드리드의 영사가 되어 R. 알베르티 등의 전위시인과 교제하였다.

 네루다의 아빠는 철도원, 엄마는 선생님. 그러나 태어나자마자 엄마는 죽고, 아빠는 테무코로 이사, 그곳에서 재혼한다. 네루다는 테무코에서 유년기를 보낸다.

 13살 나이에 벌써 일간지 [라 마냐나]에 글을 쓰고, 시집을 냈다. 16살엔 문학전문지 [셀바 아우스트랄]에 파블로 네루다라는 필명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가 흠모하던 체코 시인 얀 네루다(1834∼1891)에게서 따온 이름이다. 이 당시 썼던 시 중에 걸작이 많다. 특히 <스무 개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는 지금까지 가장 많이 번역되고 알려진 시다.

 네루다는 칠레 대학에서 불문학, 교육학 등을 공부한 뒤 24살∼31살 사이에 젊은 외교관으로 세계를 일주한다. 버마, 세일론, 자바, 싱가포르, 부에노스 아이레스 그리고 마드리드. 그때부터 썼던 시들이 네루다에게는 일대 전환점이 된다. 33살에 귀국하는 그는 스페인 내란, 친구 로르까의 피살 등에서 받은 충격으로 정치ㆍ사회적 문제에 크게 집착한다. 35살부터 네루다는 영사ㆍ총영사 등의 직함을 갖고 파리와 멕시코에서 일했다. 그중에도 민중과 역사에 대한 시작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340편의 시를 엮은, 저 유명한 <모두의 노래>(칸토 제네랄)는 훗날 네루다 문학의 중심부를 이루게 된다.

 그는 39살에 귀국, 41살에 공산당 소속으로 상원의원이 된다. 그러나 곤잘레스 비델라 대통령에게 저항했다가 2년 동안 숨어 살아야 했고, 45살에 다시 고국을 떠나야 했으며, 유럽의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 48살에 다시 귀국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이어간다.

 이후로도 '마르크시스트' 네루다는 러시아, 중국, 쿠바 등을 여행하며 문필활동을 계속했고, 1970년에 집권한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은 그를 프랑스 대사(1970∼1972)로 임명한다. 평생 40여 권의 시집을 출간하고 3번 결혼한 그는 프랑스 주재 칠레 대사를 역임 중이던 1971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73년 산티아고에서 숨졌다. 그해는 피노체트의 쿠데타가 있던 해였다.

 

【시집】<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1924) <지상의 거처>(1933∼1934) <대가곡집(大歌曲集)>(1950) <이슬라네그라 기념송>(5권. 1954) <모든 이의 노래> <대장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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