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얌체'의 어원
‘안절부절못하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못하다’까지가 들어가야만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여 일어섰다 앉았다 해 가면서 어쩔 줄 몰라하다.’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이거 너무 길다 싶어서였던지 아니면 잘못 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던지 ‘못하다’는 빼버리고 쓰고 있는 현실을 본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안절부절‘ 그것만을 가지고 어찌씨(부사)로 그냥 쓰고 있기도 하다.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며 게시판을 쳐다보고 있는 아버지는 자기 아들의 번호가 가까워올수록 ‘안절부절못하는’ 것인데, 보통은 ‘안절부절하는 아버지’로 말하고 쓰고 있으니, 이 경우는 역(逆)의 논리로 따지자면 태연한 아버지를 이름이라는 말인가.
‘얌체’라는 말이, 따져보자니 뭔가 긴 설명을 줄여버리고 의미 내용을 거꾸로 담고 있다 싶은 말이다. 본디 ‘염치(廉恥)’라는 말이 있어서 이 말은 ‘청렴하고 깨끗하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의 뜻이었다. <관자(管子)>에 ‘예의ㆍ염치는 나라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네 가지 수칙(禮儀廉恥國之四維)’이라는 대목이 나오고, 계속해서 ‘이 사유(四維)가 잘 시행되지 않을 때 나라는 망한다(四維不張國乃滅亡)’고 나와 있는 그 ‘염치’인데, 비록 출전(出典)이 한문이라고는 해도 그것이 우리 사람들에게 쓰이는 동안 순수한 우리말의 생리로 되어 그 작은말이라 할 수 있는 ‘염치’라는 말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생각한다면, ‘얌치’도 ‘염치’와 다를 것 없는 말이다.
다만, ‘얌치’라고 쓰기는 너무 정색하여 대하는 느낌이 있을 때 본디꼴을 부서뜨려서 ‘얌치’라고 쓰면서 그 감정을 충족시켜 온 느낌이 있어서, ‘염치없는 사람’이라 하면 조금 점잖게 ‘얌치없는 놈’, ‘얌칫머리 없는 놈’, ‘얌통머리 없는 놈’이면 좀 더 낮추어서, 좀 더 이죽거리는 마음으로 썼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얌치’가 됐든, ‘얌칫머리’가 됐든, ‘얌통머리’가 됐든, 그 아래에는 ‘없다’가 붙어야만 말은 되게 되어 있었던 것인데, 그것을 써 오는 사이, ‘없다’가 귀찮아서 그냥 ‘이 얌치야’, ‘이 얌통아’ 하다가 ;얌치‘ 혹은 '얌통’이 그것만으로써 ‘얌치없는 사람’이라는 뜻까지를 포함시키게 되어버린 것이다.
지금도 거의의 사전이 ‘얌치’만을 수록하면서 ‘염치’의 작은말인 양 해석해 놓고 있지만, 이제는 ‘얌체’라는 새 항목을 추가해 놓을 만하게도 되어 있는 언중(言衆)의 언어 습속이기도 하다. 그리고 ‘얌체’에 이르면, 벌써 ‘염치’나 ‘얌치’를 운위할 수 없을 만큼 더욱 후안무치한 느낌까지를 주고 있는 것이다. 이익이라면 주책없이 달라붙고, 남이 싫어하는 것도 개의치 않으며, 공중도덕이나 양식(良識) 같은 건 아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러나 폭력이나 사기술(詐欺術) 따위는 애당초 예상할 수 없는 그런 위인이 ‘얌체’라는 말의 정체로 된다고 할 수 있는 일이다.
‘염치(廉恥)’라는 그 본디의 근엄한 출발로 보자면, 터무니없는 날벼락인 셈이지만, 세상이란 새끼를 치다보면 별의별 일이 다 많은 것이어서 ‘아담’ 같은 인류의 원조(元祖)에게도 ‘카인’ 같은 동생을 죽인 살인자 아들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뿐만도 아니다. 세상일을 보아하니, 위선자(僞善者)의 군자행각(君子行脚)이 통하기도 하고, 한 단계 위축에 가는 악(惡)의 무리가 한 단계 아래축에 낄 악의 무리를 징치(懲治)한답시고 주먹을 휘두르기도 하는 판이니, ‘염치’가 ‘얌체’로까지 굴러 떨어짐을 어찌 성인군자의 도척화(盜跖化)의 측면으로만 살필 것인가.
- 박갑천 : <어원수필(語源隨筆)>(19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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